스며들다
스며들다
  • 안희자<수필가>
  • 승인 2018.04.12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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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안희자

봄볕이 쏟아지는 한낮, 오송 호수공원 옛길을 걷는다. 어린 시절 이곳 돌다리못으로 소풍을 왔었다. 몇십 년 만에 찾은 이곳은 흐른 세월만큼 낯설게 변신했다. 마을은 고층아파트단지로 변했고, 친구들과 정답게 건너던 돌다리도, 펄떡이는 붕어를 낚던 강태공도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대신, 청정한 호수와 푸른 초목들이 너른 품으로 길손을 맞이한다.

호수로 이어진 둘레길로 들어섰다. 푸른 호수는 나무를 품고 나무는 고요히 호수를 품은 듯 평화롭다. 모처럼 푸른 공기 마시며 걷노라니 봄볕이 온몸을 따스하게 어루만진다. 심호흡을 크게 해본다. 햇살이 폐부 깊숙이 흡입되어 온몸 구석구석까지 온기가 스며드는 듯하다. 봄을 실감한다. 호수를 따라 펼쳐지는 풍경이 다채롭다. 수면 위로 은빛 물결이 일렁이며 물무늬를 그리고, 산수유와 벚꽃이 팝콘 터지듯 만개했다. 꽃샘추위가 몽니를 부려도, 세상이 어지러워도 공원의 생명체들은 다시 피어나 제자리를 의연하게 지키고 있다.

걸음을 멈추고 서성이던 그때, 물가에 뭉게구름처럼 피어나는 버드나무 무리들이 보인다. 실가지마다 연두 물감을 풀어놓은 듯 아롱댄다. 여린 버들강아지가 실눈 뜨고, 초록 잎이 입술마냥 내밀었다. 바람이 스칠 때마다 나뭇가지들이 능청능청 휘어진 채 머리카락 흩날리며 춤을 추고 있다. 초록의 향연이 몽환적이다. 봄의 전령사, 그중 버드나무가 없다면 이 봄이 찬란할 수 있을까? 연둣빛 버드나무를 바라보면 어떤 기운이 불끈 느껴진다. 내 안에 솟아오르는 초록 이파리들이 움을 틔우려 꿈틀대는 기운일 게다.

버드나무는 주로 하천 주변에서 서식하는 식물이다. 그래서인가. 요란하지 않게 고요히 봄을 알리는 버드나무를 보면 화려하진 않지만 은은한 멋이 있어 좋다. 수많은 꽃이 함께 어울려야 아름답듯 버드나무도 홀로 있을 때보다 무리지어 있을 때 그 빛을 발한다. 긴 추위에도 물가에서 알몸으로 뿌리박고 핀 버드나무들이 애잔하여 가슴이 젖는다. 어떤 연유로 척박한 곳에 꽃을 피웠을까. 꽃말이 순수이듯 살을 섞는 순간, 뿌리에서 온몸으로 뜨겁게 스며들어 마침내 연둣빛으로 물들었구나. 자연의 경이로움에 나는 두 손을 모았다.

스며든다는 것은 버드나무처럼 물이 오른다는 의미이다. 사람도 서로의 마음에 깊이 스며들어야 한마음이 되는 것이다. 어디 식물뿐이겠는가. 부부 사이도 마찬가지다. 우리 부부도 곱게 스며들지 못했다. 처음엔 서로 탓하며 원망했다. 돌아보면 그는 과묵한 반면 나는 감성적인 성격이다. 서로의 마음에 스며들어야 아름답게 물든다는 걸 왜 몰랐을까.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말이 필요 없다. 서로 마음과 마음으로 조율해 가는 것이다. 그가 뿌리라면 나는 가지가 아니던가. 투정하기보다 배려하며 인내하고 살다 보면 깊이 스며드는 것을. 긴 시간 함께 살다 보면 아름다운 꽃을 피우리라. 버드나무가 초록으로 물들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 인내했을까. 버드나무를 보며 생각한다. 나는 누군가의 마음속에 스며들어 제대로 물들고 있는지 되돌아본다. 오랜만에 둘레길을 걸으며 동심으로 돌아가 봄을 낚았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풍경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이다. 오송 호수공원의 봄이 푸르게 익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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