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시론
충청시론
  • 충청타임즈
  • 승인 2007.02.23 09:4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작록고(爵祿考)
윤 광 희 <수공 충주권관리단장>

대부분의 사람들은 벼슬을 얻어 출세를 하고, 이에 걸맞는 녹봉(祿俸)을 받는 것을 지극한 영광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벼슬살이를 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지켜야 할 법도와 이치가 있기 때문에 이는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출사(出仕)하여 그만 둘 때까지 명심하고 근심하며 지켜야만 할 사항이 한 두 가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요즘에는 벼슬살이를 흔히 공직생활이라고 말한다. 대학 4년을 졸업하고도 석·박사 과정까지 마친 취업준비생들이 날로 늘어나고 있다.

게다가 취업이 안돼 취업재수, 삼수생도 늘어만 가고 있다고 하니 그들에게는 답답한 현실이 원망스러울 것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공직생활의 법도를 얘기하는 것이 적절치 않을런지도 모르겠으나, 국가의 백년대계를 생각할 때 이는 매우 중요한 일이라 하겠다.

논어의 이인(里仁)편에는 '벼슬자리가 없음을 근심하지 말고 그 자리를 차지할 능력에 대해 근심할 것이며, 남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음을 근심하지 말고 남이 알아줄 수 있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不患無位 患所以立 不患莫己知 求爲可知也)'는 내용이 들어 있다.

사람은 벼슬자리를 구하기 전에 우선 자신의 능력을 스스로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여러 가지 재주나 능력이 있다 해도 그 자리가 국민을 위한 공복의 자리임에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국민의 공복인 공직자가 공직을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인격이나 품성과 같은 됨됨이는 갖추어져 있는지, 직무수행 능력과 자질은 잘 훈련되었는지를 꼼꼼히 따져봐야만 하는 것이다.

옛날 어진 시대에 벼슬살이하던 많은 선비들은 벼슬살이에 필요한 법도를 늘 벽에 써 붙여 놓고 아침저녁으로 바라보면서 자신의 행동이나 마음에 어긋남이 있다고 생각되면 초개와 같이 벼슬을 내던지곤 했다고 한다.

또한 벼슬살이를 하면서 검소함은 이루 말할 수 없고, 자신의 녹봉 이외에 다른 어떤 재물도 탐하지 않았으니 벼슬살이를 하는 선비의 집안은 늘 궁핍함을 면치 못했으리라.

이렇게 의연한 자세로 벼슬에 임했으니 감히 어느 누구에게 시비의 상대가 되었겠는가. 그렇지 않고 벼슬자리를 잃을까 두려워 전전긍긍한다거나, 권문귀척(權門貴戚)의 문지방이나 드나들며 부정부패를 일삼았다면 그 자리를 얼마나 견뎌냈겠는가.

사리사욕을 물리치고 자신까지도 희생하며 국민에게 봉사하는 멸사봉공(滅私奉公)의 청렴한 선비를 청사(淸士)라 한다. 속담에 '벼슬살이는 머슴살이'라는 말이 있다. 벼슬아치, 즉 공복(公僕)은 국민에게 봉사하며 국민의 종노릇을 하는 공직자다. 벼슬살이의 법도와 이치를 밝게 익혀 한 치의 어긋남이 없이 실행에 옮기는 것만이 국민의 진정한 공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0여년 동안 모택동과 함께 중국대륙을 이끌었던 저우언라이(周恩來)의 가훈(家訓) 10조(條)는 그 내용이 모두 공무수행과 관련한 내용들이었다. 1976년에 사망한 그는 "사후에라도 단 한 치의 땅도 자신 때문에 쓰여지는 일이 없도록 죽은 후에는 화장하여 유골을 고향산천에 뿌려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그가 죽었을 때 생전에 남긴 재산이라곤 우리 돈으로 불과 60여만원 밖에 안 되었다고 하니, 그야말로 작록(爵祿)의 법도를 지켜낸 청고(淸高)한 지도자였다고 할 수 있겠다.

그는 생전의 벼슬이나 그가 이룩한 업적에 비해 너무 적은 봉록으로 국가에 봉사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현대 중국인들에게는 마오쩌뚱(毛澤東)보다도 더 선호하는 중국 역사상의 인물로 비춰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