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목련
백목련
  • 충청타임즈
  • 승인 2007.02.21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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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마와 단풍나무
김 혜 식 <수필가>

철마 위의 단풍나무가 왠지 애처롭다. 신문에 난 사진을 자세히 보니 겨울이 닥쳐오자 잎을 벗은 나목이었다. 비록 철마는 더 이상 달리지 못해 멈췄지만 자신의 뜨거운 심장을 단풍나무에게 내주었나보다. 그것은 곧 나무의 수액에 피돌이를 일으켜 철마 위에 소 힘줄보다 질긴 생명줄을 내리게 했다.

6·25전쟁이 한창인 1950년 12월 31일 밤 10시쯤, 경기도 파주시 장단면 비무장 지대에서 폭격으로 발이 묶인 철마였다. 육중한 기관차 화통에 무수히 나 있는 총탄자국, 표면을 가득 덮은 검붉은 녹, 오랜 세월 비바람에 부식돼 부서진 기관차는 전쟁으로 인한 민족의 상흔을 대변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나는 그 증기기관차 화통 위에 가까스로 뿌리 내린 단풍나무에 갑자기 친정아버지의 얼굴이 겹쳐 보이는 듯했다. 그리곤 나도 모르게 눈가가 젖기 시작했다. 전쟁의 아픔을 온몸으로 겪으며 멈춰선 철마. 그 철마에 의존하여 끈질기게 생명을 이어온 단풍나무는 마치 지난날 아버지의 모습과 흡사하다고나할까.

아버진 젊은 날 고향인 함흥 청진에서 홀로 남하하였다. 남한에서 고학으로 최고 학부까지 마친 후 경찰에 투신, 그 당시 20대 후반의 젊은 나이에 지서장 자리까지 올랐었다. 그러나 그런 사회적 명예도 걸핏하면 도지는 아버지의 향수병을 온전히 치유하진 못했다. 이북에 계신 부모님과 형제들 생각에 홀로 눈물짓는 날이 많았던 아버지였다.

남한에 피붙이라곤 전혀 없어 정붙일 곳 없었던 아버지. 부모 그늘을 벗어나 험한 세상을 사노라 얼마나 고초가 심했을까. 아버진 평소에 북쪽 하늘만 바라보아도 시린 가슴이 따뜻했노라고 말씀하실 정도였다. 전쟁으로 인해 자신의 뿌리를 송두리째 뽑힌 그 슬픔을 자식인 내가 어찌 다 헤아리랴.

아버지에게 고향은 어머니의 품이요. 삶의 버팀목이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아버진 그런 고향을 생전에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

낯설고 물 설은 타향에서 홀로 온갖 고생을 하며 학구열까지 불살라야했던 청년 시절, 그분의 지난 삶은 기관차 위에 위태로이 서 있는 저 단풍나무의 신세나 진배없었으리라.

그럼에도 꿋꿋이 세파를 헤치고 가정을 이뤄 이렇듯 나와 우리 형제들의 부모로서 인연을 맺게 된 것이다.

철마 위에 단풍나무는 해마다 잎을 피우고 아름다운 색깔로 붉게 물들을 것이다. 그러나 그토록 강인한 의지로 난관을 극복해 온 아버지는 이미 고인이 되신지 오래다.

오늘도 비무장 지대에 짐승처럼 웅크리고 있는 저 철마는 언제나 기지개를 한껏 키며 북으로 힘차게 달릴까. 하여 그토록 아버지가 몽매에도 그리던 고향땅을 어느 때 나라도 그것과 함께 마음놓고 밟아 볼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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