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영덕의 실크로드 견문록 <77>
함영덕의 실크로드 견문록 <77>
  • 충청타임즈
  • 승인 2007.02.20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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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르칸트 소그디니아인들의 상술과 제지술의 전례
포로로 잡힌 제지기술자들 종이의 길' 트다
   
▲ 구르 아미르 모슬렘 입구로 티무르와 그의 손자등 3대 제왕의 묘가 안치되어 있다. 이 건물은 1404년 티무르가 전쟁에서 죽은 손자 무함메드 술탄을 위해 만들었다.

실크로드의 두 번째 전성기는 15세기 티무르제국의 흥망성쇠와 더불어 끝을 맺게 된다. 콜롬버스의 아메리카대륙 발견과 마젤란에 의해 개척된 중국으로 가는 바닷길의 발견으로 몇 년이 걸려야 했던 위험한 육로가 단 몇 개월의 항해로 지중해의 항구에 도착할 수 있게 되는 바다의 비단길이 열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중세의 가장 화려한 도시 사마르칸트는 실크로드상의 빼어난 입지조건으로 인해 각 시대마다 중요한 교역지이자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서쪽으론 메리프와 페르시아, 터키를 지나 지중해로 이어지는 루트를 가졌고 남쪽으로는 흰두쿠스 산맥을 지나 인도와 연결되는 실크로드가 두 갈래로 나누어졌던 분기점이기도 했다.

대상로들이 만나는 거대 분기점

사마르칸트는 대상로들이 만나는 거대한 분기점이었으며 과학기술과 예술양식, 종교들의 중개자 역할을 한 도시이다. 실크로드상에서 일어난 거의 모든 종교들은 이곳에 들어와 포교활동을 펼쳤고, 타고난 장사꾼인 소그디아나 민족에 의해 널리 유포되었다.

물질문명의 교류에 족적을 남긴 유명한 상인집단으로는 로마상인과 서역상인(商胡), 소그디아나 상인, 아랍상인, 베네치아 상인을 들 수 있다. 중세의 동서교역에서 맹활약한 사람들은 서역상인들이다. 페르시아와 소그디아나, 대식(大食, 아랍), 회흘(回紇), 유태 상인들이 여기에 포함된다. 이들 가운데 가장 활발한 교역활동을 벌인 사람들은 페리시아와 소그디아나 상인들이다. 소그디아나는 오늘날 사마르칸트를 중심으로 발흥한 민족을 말한다. 실크로드학에 소개된 소그디아나 상인들의 특유의 상술과 집념을 나타내는 일화가 있다.

소그디니아 인들은 천부적인 장사꾼들로서 남자는 5세가 되면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어느 정도 배우고 나면 곧 집을 떠나 장사를 익힌다. 그들에게는 돈을 많이 버는 것이 곧 선행이다. 당시 주민 대부분이 소그디인이었던 강국(康國, 현 사마르칸트)에서는 어린애가 태어나면 입안에 석밀(사탕)을 넣어주고 손바닥에는 아교를 바른다. 그것은 어린애가 자라서 입에서는 언제나 석밀처럼 달콤한 말이 술술 나오고, 돈을 쥐면 아교처럼 딱 붙어서 빠져나가지 말기를 소원해서이다. 남자는 20세가 되면 돈을 벌러 외국에 나가는데 돈벌이가 되는 곳에는 그들의 발자국이 꼭 찍혀 있게 마련이었다. 이것은 상역에 대한 소그드인들의 천부적 집착을 설명해 주고 있다.

사마르칸트는 동서 문명의 교차지역이며 실크로드 문물이 교류되는 역사적인 도시이다. 특히 751년 탈라스 전투에서 고구려 출신 고선지 장군이 이끄는 당군은 석국(石國)과 이슬람 연합군과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2만 명이나 포로가 되었는데, 그 중에서 제지 기술을 비롯하여 여러 직종의 기술자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 기술자들에 의해 처음으로 강국(康國)의 수도 사마르칸트에 제지소가 생겨났다. 이것이 효시가 되어 서아시아 및 아프리카의 이슬람제국에 제지술이 점차 전파되었고 급기야는 곳곳에 제지소가 건설되었다.

제지업 산파역할을 한 사마르칸트

제지기술이 이곳으로부터 점차 이슬람제국 각지에 전파됨으로써 사마르칸트는 이슬람제국의 제지업의 산파역할을 하게 되었으며, 바그다드와 다마스쿠스, 카이로, 페스(Fes)로 전파되었다. 페스는 현 모로코 왕국의 고도로서 아프리카의 서북단에 위치해 있다. 15세기 이전까지 페스는 아프리카와 유럽을 연결하는 교통요지에 위치한 최대 규모의 제지도시로서 유럽에 종이를 공급하였다.

19세기 말엽까지 종이는 페스의 주요 대외 수출품이었다. 이슬람 세계와 밀접한 관계에 있던 유럽에서도 12세기 중엽부터 아랍인들로부터 제지술을 전수받아 제지업이 일기 시작하였다.

오늘날 키르기스탄 영토인 탈라스에서 751년에 벌어진 아랍문명권과의 전투에서 당군 명장 고선지 장군의 패배는 중앙아시아의 이슬람화가 시작되는 계기를 마련하였고, 불교문화의 쇠퇴는 물론 중국의 영향권에서 멀어지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승리자들은 당시 포로들 가운데 종이 제작 기술자들을 끌고 와서 사마르칸트에 종이 제작 공장을 차렸고, 서쪽 부하라와 더불어 이슬람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 인류문명을 바꾼 4대 발명품

세계문명을 바꾼 4가지 발명품이 있다면 화약, 종이, 인쇄술과 나침반을 들 수 있다. 중국에서 발명한 종이가 이슬람세계를 거쳐 아프리카와 유럽으로 이어지는 통로 역할을 한 곳이 바로 사마르칸트이다. 인류문명의 전기를 마련했던 인쇄술은 현존하는 유물만 비교해보면 한국은 세계에서 조판인쇄(목판인쇄)를 가장 먼저 시작한 나라가 된다. 1966년 경주 불국사 석가탑 탑두부(塔頭部)에서 발견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760년)은 중국의 가장 오랜 인쇄물 유품보다 100여년 앞서고 있다.

금속활자도 고려 고종(高宗) 치세 때인 1230년쯤에 이미 금속활자가 출현하였으며, 1377년에 금속 동활자로 불전(佛典)을 인쇄하였다. 독일의 구텐베르크가 1438년쯤에 납활자를 주조하고 인쇄기를 발명해 1454년 처음으로 성서를 인쇄 출간한 것보다 80년이나 앞서고 있다. 정수일이 실크로드학에서 밝혔듯이 인쇄술의 교류에 대해서는 명확하지 못한 점들과 이론이 많이 생겼지만 총체적인 면에서 동방의 조판인쇄술이 서전(西傳)하여 서방의 인쇄술 발달에 영향을 미쳤다는 데는 동서양학계의 일치된 견해다.

금속활자술 발명 후 중국에 전수

금속활자의 인쇄는 한국에서 발명된 후 곧바로 중국에 전수되었으며, 임진왜란을 계기로 1593년 일본에 전해졌다. 금속활자 인쇄술을 전수받은 중국인들은 이 새로운 문명수단을 서방과 통교하였다. 그 교류의 중개자는 광대한 중앙아시아 일원을 아우른 티무르제국(1369-1500)이었다.

14세기 말쯤부터 15세기 중엽까지 티무르제국의 수도 사마르칸트는 동서교통의 요로에 있는 국제도시로서 동서교류의 교량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제지술의 서전과 함께 인쇄술의 서전은 유럽의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등 지적 개화를 촉진함으로써 유럽의 근대화에 지대한 기여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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