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소불욕 물시어인
기소불욕 물시어인
  • 방석영<무심고전인문학회장>
  • 승인 2017.12.14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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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 論
▲ 방석영<무심고전인문학회장>

`기소불욕(其所不欲) 물시어인(勿施於人)'이란 말이 있다. 자신이 바라고 원하지 않는 일이나 당해서 싫은 일을 누군가 대신 해주기를 바라지도 말고, 타인에게 강요하지도 말라는 공자님의 말씀이다. 그런데 이 같은 가르침을 알았다고 해서 그 즉시 인생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 같은 가르침을 실천하기 위해 애써 노력한다고 해도 그 것이 전부는 아니다. 그 어떤 훌륭한 가르침도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 속에 녹아들기 전에는 지행합일(知行合一)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타인을 배려하라는 `기소불욕 물시어인' 조차도 머리로 이해하고 아는데 그치면, 얼마든지 오남용하거나 악용할 수도 있는 것이 인간이다. 만물의 영장인 인간은 보검도 타인을 해치는 살인도(殺人刀)로 전락시킬 수 있고, 녹슨 칼도 자신을 살리는 활인검으로 활용할 수 있을 만큼 전지전능한 존재다. 인간은 그 어떤 가르침도 타인을 지적하고 비난하거나, 자신을 합리화시키고 돋보이게 하는 도구로 능히 견강부회 할 수 있는 존재다.

따라서 `나 없음'의 무아(無我)를 깨닫고 너와 내가 둘 아님을 증득함으로써 `심령이 가난한 자'로 거듭나야만 한다. 나와 동등하게 상대방을 대하려고 애쓰는 것도 아름답지만, `나 없음'의 무아행(無我行)만이 진정한 정어(正語) 정행(正行)을 담보해 내는 지행합일의 삶, 사랑과 자비로 넘쳐나는 참다운 삶을 가능케 하기 때문이다.

`기소불욕 물시어인'이란 말을 머리로 건조하게 이해한 뒤 애써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온 몸의 세포 하나하나 속에 녹여냄으로써 저절로 지행합일이 되는 것을 도덕경은 `무위(無爲) 무불위(無不爲)'란 다섯 글자로 설파하고 있다. `무위 무불위'는 애써 하거나 억지로 하지 않음이 없다는 의미로 도교의 최고 경지인 무위자연(無爲自然)과 다르지 않다. 애써 함이 없다는 `무위(無爲)'에 이어서 스스로 그러한 `자연(自然)'이 바로 억지로 하지 않음도 없다는 `무불위(無不爲)'이다. 무위자연은 불교에서 말하는 `나 없음'의 무아(無我)에 따른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 즉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일으킨다는 가르침과도 전혀 다르지 않다. 매 순간 스스로를 부인하고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짐으로써 자신의 모든 주견을 텅 비워낸 뒤, `심령이 가난한 자'로 거듭나 성령의 도구로 온전히 쓰이라는 성경의 말씀 또한 `무위자연'의 삶에 다름 아니다.

`나 없음'의 무아(無我)를 깨달아 증득하고 물처럼 흘러가는 무위자연의 삶을 살고 있다면, 손과 발이 외직 한 몸이라는 견해를 고집하는 `나'도 없는 까닭에, 손과 발이 한 몸인 가운데 손은 손이고 발을 발이란 사실도 결코 간과하는 일이 없다.

따라서 장갑은 손에 끼고 양발은 발에 신을 뿐, 양말을 손에 끼려고 하거나 장갑을 발에 신으려고 하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허술한 신발을 신은 탓에 발에 동상이 극심하면 기꺼이 손에 끼고 있는 장갑을 벗어 발을 감쌀 줄도 안다. 털신을 신어서 발은 따듯한데, 장갑을 잃어버린 탓에 손이 꽁꽁 얼어붙었다면, 일말의 머뭇거림도 없이 즉시 양말을 벗어서 언 손을 감쌀 줄도 알게 된다. 손과 발이 각 각 별개면서도 한 몸이듯이, 이 세상 또한 일즉다(一卽多) 다즉일(多卽一), 즉 하나가 여럿이고 여럿이 하나인 운명 공동체다. 실상이 이와 같은데 그 구성원들이 어찌 서로 서로를 살리는 상생(相生)의 길을 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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