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 마중
상상 마중
  • 이재정<수필가>
  • 승인 2017.11.28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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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 이재정<수필가>

바그너의 혼례의 합창이 울려 퍼진다. 그 경쾌한 음률에 맞추어 우아한 신부가 입장한다. 먼저 나가 있던 신랑은 곁에 올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신부마중을 나온다. 긴장된 표정이다. 저때에 신랑은 무슨 생각을 할까 궁금하다. 이어 아버지의 손에서 신부의 손을 옮겨 받는다. 아버지는 잘 부탁한다는 눈빛으로 서운함을 배웅한다. 둘은 부부가 된다.

결혼이라는 새로운 삶을 상대의 마중으로부터 시작한다. 짧은 시간임에도 참지 못하고 데리러 나오는 건 환영의 의미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만큼 반가움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새신랑의 마중을 보면서 잊고 있던 나의 마중이 생각났다. 내일이 입동이다. 겨울을 절기상으로 입동부터 입춘까지라 정의한다면 나의 겨울은 길다. 추위를 많이 타는 나에게는 11월부터 3월까지 다섯 달이나 된다. 이미 와 있는 셈이다. 아직도 겨울 맞을 채비를 하지 못한 것이다.

열을 올리고 타오르던 단풍불도 찬바람에 잦아들었다. 허허벌판에 바람이 불어온다. 온몸이 시리다. 왠지 올해는 상강의 바람이 미리 귀띔을 해 주었어도 게으름을 피웠다. 농막에 눈처럼 수북이 쌓인 낙엽을 팔이 아프도록 쓸어내는 그이를 보면서 만추임을 알아채고도 미루는 중이었다.

나를 옴짝달싹 못하게 하는 추위가 싫었다. 나목이 된 풍경도 무채색이 된 썰렁한 거리도 보기 싫었다. 크게 우는 바람 소리도 무서웠다. 그런 냉랭한 겨울로 나서기가 망설여진 것이다. 주례사를 들으며 나란히 서 있는 둘은 인생을 새로 시작하는 엄청난 일 앞에도 설레고 있다. 겨우 계절이 바뀌는 것에 겁을 내는 내가 부끄러워진다. 이제 마중을 나서야겠다.

가을의 끝자락을 놓아준다. “마중은 세 걸음, 배웅은 일곱 걸음”이라는 속담이 있다. 돌아가는 이들을, 흘러가는 것들에게 마음을 더 쏟아야 한다. 서운하지 않게 잘 보내라는 뜻이다. 가을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어 줄 생각이다. 그리고 오는 겨울을 팔을 벌려 반기리라.

나는 겨울로 과감히 나선다. 밖에 나가기를 엄두 내지 못하고 웅크리고만 있었으니 바보가 따로 없다. 집으로 돌아가면 겨울코트를 꺼내 정리하고 김장준비도 서두를 생각이다. 문풍지로 바람을 막을 계획도 세우려 한다. 마음이 바빠진다.

마중이라는 말에는 설렘이 들어 있다. 보고 싶은 이나 반가운 사람이 올 때 먼저 길을 나서게 하는 말이다. 올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동구 밖에서 서성이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서성이는 동안은 마음이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다. 너무 이른 시간에 나가 있어도 안 된다. 오랜 시간을 부풀게 되면 풍선이 터질 수도 있다. 적당한 시간에 나와서 기다려야 만이 지치지 않고 기쁨이 배가 되는 법이기 때문이다.

지금이 빠르지도, 늦지도 않은 때다. 겨울은 삭막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세상을 하얗게 마법을 부려 환상 속으로 빠져들게 할 것이다.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동백과 매화가 빨갛게 피어날 테고 눈꽃도 눈부시게 피어날 터이다. 혹시 아는가. 들뜬 목소리로 첫눈이 왔다고 나에게 전화를 주시는 사람이 있을지. 겨울이 살살 녹는 입안의 아이스크림처럼 달달하다.

어느새 멘델스존의 결혼행진곡이 울린다. 피아노의 선율에 둘은 나란히 퇴장을 한다. 활짝 웃고 있다. 어여쁜 한 쌍의 로맨스가 환하게 꽃을 피우는 순간이다. 일순, 황홀경에 숨이 멎는다.

나의 겨울이 상상으로 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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