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목련
백목련
  • 충청타임즈
  • 승인 2007.02.07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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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거길 갔을까
임 정 순 <수필가>

눈발이 휘날리는 오후. 달랑 하나만 들어 있는 우편물을 장바구니에 넣고 집안에 들어섰다. 한참 동안을 내리는 눈에 눈을 떼지 못하고 창가에 섰다가 우편물이 생각났다. '주·정차 위반 사실통보서'였다. 분명 남편의 차량번호가 또렷하다. 가볍게 일렁이는 묘한 것은 그까짓 과태료는 문제가 아니다. 아니 내가 친구들과 부산 해운대로 여행을 떠나던 날이 아닌가. 상상력은 날개를 날고 KTX타는 대전까지 데려다 준다는 호의마저 의심에 꼬리를 문다. 덩그마니 남편만 남겨놓고 떠나는 여행이 미안해 도망치다시피 떠났는데.

왜 거길 갔을까 위반 장소는 높게 담을 친 아파트 신축공사장 앞이다. 그 시간대는 편하게 주차해도 되리라 생각한 남편의 판단에 쐐기를 박은 것이다. 바로 그 자리에 나도 주차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주변 상황을 뻔히 안다. 그러기에 어떻게 이 문제를 접근할까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콘도를 예약한 서울친구 덕분에 처음으로 타본 KTX. 미끄러지듯 출발하는가 싶더니 휙휙 지나가는 풍경이 어지럽다. 그 만남이 족히 40년도 더 된지라 이야기보따리가 기차 길이보다 더 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행을 좋아하는 친구가 동행하지 못해 옆자리는 비어 있지만, 친구가 당한 슬픔을 함께 하지 못한 미안한 마음이 더 크다. 며칠 전 남편이 암으로 세상을 떠나 말도 꺼내지 못하고 셋이서만 떠난 여행이다. 해변을 따라 세워진 고층빌딩 숲과 잔잔한 바다 물결 위로 유유히 멀어지는 유람선이 오륙도 섬 뒤로 사라진다. 너무도 변한 해운대의 모습과 여행지에서의 낯설음이 주는 객기가 발동한다. 서둘러 여장을 푼 뒤 동백섬을 지나 백사장을 거닌다. 가족들과 산책 나온 강아지와 백 갈매기가 장난을 한다. 철썩거리는 파도소리와 연인들의 웃음소리에 문득 객지생활을 하는 아이들이 보고 싶다. 모래 위에 아이들 이름을 쓰고 나니 이내 파도가 지워버린다. 마치 가족도 집도 잊어버리고 마음껏 자유를 만끽해 보라는 충고 같다.

일상을 쉽게 탈출하지 못하는 변변함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주부가 건강하고 즐거워야 집안이 잘 돌아간다는 사실은 누구나 다 안다. 이에 친구는 사진기술을 습득해 개인전을 열기도 하고 학교 다닐 때 하고 싶었던 고전무용을 오십이 넘어서야 실현하고서 아주 만족해 했다.

외국인 근로자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서울친구. 빈둥지를 탓하지 말고 가지고 있는 것을 나누면 채워진다는 비밀을 터득한 우리네들. 오랜만에 별렀던 여행인지라 자기 자신한테 최대한으로 대접해야 된다는 데는 모두가 이의가 없다.

우선 먹을거리에 과감했다. 집에서는 아이들이나 남편에게 한 번 더 주려고 먹지 않았던 도가니탕을 보약처럼 먹었다. 큼직한 문어도 살짝 데쳐 실컷 먹으면서 호사를 누렸다. 때로는 남편도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무슨 선심이라도 쓰듯 이번엔 곰국도 끓여 놓지 않았다.

한나절도 못 견뎌 외출한 것을 들키다니. 야릇한 웃음이 자꾸만 나온다. 허점을 좀처럼 보이질 않아 구박을 받아오던 내겐 절호의 찬스다. '왜 거길 갔을까 혹시.' 퇴근하고 돌아 온 남편에게 들이 민 고지서에 고개를 갸우뚱거릴 뿐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눈빛엔 여전히 철없는 작은 여자만 보인다. 무슨 빌미라도 잡은 듯 호들갑 떨던 수선스러움이 오히려 부끄럽다.

퇴직 후 끝까지 책임지려 한 지아비의 고뇌와 무거운 짐은 내 탓이 아닌 양 방관하는데, 남편은 왜 거길 갔을까. 제과점을 하는 친구가 그 근처에 있다는 사실을 예전에 왜 몰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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