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스케치
여행 스케치
  • 이재정<수필가>
  • 승인 2017.10.24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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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 이재정<수필가>

“땅 땅 땅”

“너에게 소박한 사치를 허락하노라”

한 여인에게 내리치는 판결봉 소리다.

나는 나에게 소박한 사치를 허락한다. 오로지 나만을 위하여 어느 날 꽃집을 지나다가 식탁에 올려놓을 꽃 몇 송이를 사고 서점에 들러 시집을 사기로 한다. 젊었을 때는 여유가 없으니 마음의 사치까지도 부릴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이제 내 손길이 필요 없을 만큼 커버린 아들. 혼자만의 시간이 늘어나는 나이가 되어 뒤를 돌아다보게 된다. 앞만 보고 정신없이 걸어온 쉰을 넘긴 여자가 보인다. 힘들게 걸어온 울퉁불퉁한 길 위에 내가 서 있다.

갱년기를 호되게 앓고 있는 나에게 하고 싶었던 것들을 억눌러야 했던 지난날들이 보상심리로 돌아왔다. 이렇게 온몸이 마디마디가 아파오는 이 시기를 지나면 여자로서의 삶도 끝난다는 생각으로 서글퍼진다. 나이가 들면 배운 이나 배우지 못한 이. 예쁜 이와 미운 이가 다 똑같아진다는 말이 있다. 그전에 이제는 여자라는 이름으로 사치를 부려보고 싶다. 비싼 옷은 아니어도 좋은 옷을 보면 사고, 명품백은 아닐지라도 멋진 백도 사고 싶다.

판결 후에 첫 사치를 해외여행으로 잡았다. 아들이 스물여덟 살이 되도록 해외를 나가보지 못했다. 그이와 아들은 꽤 갔지만 나만이 그럴 기회가 없었다. 이쯤이면 처음으로 누리는 사치가 소박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무리일 수도 있다. 지금껏 한눈팔지 않고 열심히 살아온 나에게 내린 상(賞)이다. 언젠가는 보고 싶었던 만리장성을 여행지로 정한 것도 나의 결정권이었다. 가족들도 이런 내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군소리가 없다.

캐리어에 짐을 챙기는 일은 누구보다도 들뜨고 설레는 준비였다. 낯선 나라의 풍경을 담고 이방인들을 만날 생각에 흥분된다. 고도의 하늘 위에서 바라본 구름은 목화 솜으로 만든 푹신한 이불이 되어 달달한 낮잠이 몰려왔다.

빽빽한 일정으로 중국의 한 부분을 보고 왔지만 3박 4일의 시간은 아쉬움이었다. 얼굴을 일그러지게 하는 그들의 매너와 불친절한 사람들로 하여 다시는 올 곳이 못 된다고 말하면서도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또다시 장가계를 떠올리고 있다.

행복은 종착역에 도착했을 때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여행 중에 발견하는 것이라고 했다. 삶 또한 여행이다. 나이를 먹으면서 새로운 곳을 보게 되고, 모르던 것을 알게 되고, 색다른 일을 경험하면서 배워가는 과정이다. 죽음이라는 마지막 역에 도달했을 때 행복을 한꺼번에 느끼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을까. 느낀들 얼마나 허무하랴. 여로에서 불쑥불쑥 찾아와 주는 충만감이야말로 참 행복이다.

삶과 삶의 다리가 되어 지치지 않게 이어주는 힘이 되는 여행은 얼마 동안의 일탈이다. 그것은 끝이 후회와 상처를 남긴다고 한다. 상처도, 후회도 기억으로 남는 귀여운 일탈이다. 켜켜이 쌓여갈 추억이다. 음식이 맞지 않아 먹지를 못해도, 말이 통하지 않아 답답해도 좋다. 서로 마음이 통하여 눈이 마주치면 웃으면 된다. 그것이 여행이다.

힘들지라도 나는 떠날 것이다. 곳곳에 숨어 있는 나를 찾아보고, 만나고 돌아올 것이다. 그 길에서 부딪히는 여러 색깔의 이야기들로 하여 나의 노년이 쓸쓸하지 않을 거라 믿는다. 인생이라는 여행을 마칠 즈음에는 추억할 게 많은 사람이 잘살았다는 증거가 될 테니까.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노라고 말할 수 있을 나를 꿈꾼다. 캔버스에 여행 스케치는 이렇게 끝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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