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신의 전성시대
배신의 전성시대
  • 정현수<칼럼니스트>
  • 승인 2017.10.19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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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 論
▲ 정현수<칼럼니스트>

옆집 중호네가 소를 샀다. 서울 봉제공장에서 일하는 중호 누나가 보낸 돈으로 산 소를 중호 아버지는 며칠이나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간 그녀는 산골마을 모두에게 서울에 대한 환상을 심어놓았다. 실제로 중학교를 졸업한 동네 누나 몇이 그녀를 따라 서울로 갔다. 상경(上京)은 오빠의 대학 등록금을 보태고 동생들에게 용돈을 줄 수 있는 그 시대 누나들의 유일한 대안이었다. 그때가 1980년대, 전태일 열사가 평화시장에서 근로기준법을 지키라며 분신한 지 10년이 지난 때였다.

서울로 떠나는 딸에게 산골 부모들은 몇 번이나 주의를 주었다. 거기는 눈 떠도 코 베어 가는 곳이니 몸가짐을 늘 조심하라고. 그럼에도 딸을 서울로 보낸 건 거기도 사람 사는 곳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아무리 삭막해도 사람이 우선일 거라는 막연한 믿음이 있었다. 그 믿음에 의지해 산골의 많은 누나들이 새벽 기차에 몸을 실었다. 중호네 소를 온 동네 사람들이 흐뭇하게 바라본 것처럼 서울 역시 누군가의 기쁨과 아픔을 함께하는 곳이라 생각했다.

1970년대 영화 「영자의 전성시대」. 짙은 화장과 짧은 치마의 포스터 때문에 애마부인이나 산딸기 같은 성인영화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사회 고발 영화다. 잔혹한 개발 독재 시대에 나약한 여성이 자본의 힘에 떠밀려 몰락해 가는 과정을 필름에 담았다. 상경한 영자가 자본가에게 몸을 빼앗기고 버스 차장 등 사회 밑바닥을 전전하다 결국엔 팔이 잘려 사창가로 흘러든다는 비극적 서사를 바탕으로 한다. 당시 사회문제로 떠오른 무작정 상경에 대한 경고의 의미였지만 지금 관람하기에도 비참한 서사다.

영화를 개봉한 지 40년이 지났다. 당시 자본에 의한 영자의 몰락이 고전적 서사를 바탕으로 한다면 현대판 영자들의 수난은 복잡하고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난다. 농사지을수록 손해 볼 수밖에 없는 구조에서 쌀값 인상을 요구하러 전남에서 상경한 고(故) 백남기 농민이 현대판 영자다. 충남에서 근무하다 서울로 차출돼 생면부지 농민들에게 물대포를 쏴야 했던 두 명의 말단 경찰관들도 그렇다. 쌀값 인상 요구를 정부가 들어줄 거라는 믿음, 명령에 따라 시위대에게 물대포를 쏴도 아무 문제없을 거라는 믿음으로 그들은 상경했다.

서울이 영자에게 그랬던 것처럼 박근혜 정권은 시위대를 시골에서 금방 올라온 어수룩한 영자로 여기는 듯했다. 어수룩한 이를 함부로 대하는 자본가처럼, 시위대를 농민이나 국민이 아닌 폭도로 규정하고 그 추운 날 물대포를 함부로 쏘아대며 마음껏 배신했다. 그러다 발생한 백남기 농민의 죽음에 대한 책임은 충남의 말단 경찰 두 명에게 돌리면 그만이었다. 자기들도 미안했던지 최근엔 구은수 전 서울청장과 현장 책임자를 불구속 기소하는 것으로 선을 그었다. 마치 “니들의 믿음과 우리의 배신은 여기가 접합점이야, 더 이상은 안 돼.”하는 것처럼.

배신의 전성시대. 영자의 몰락이 자본주의 부산물이란 시각엔 동의할 수 없다. 그러면 백남기 농민의 죽음과 두 말단 경찰의 억울함도 비판 없이 받아들여야 하니까. 구치소 최고 시설을 누리면서도 더럽고 차가운 감방에서 인권을 침해당했다고 주장하는 박근혜 전 대통령. 명령에 따랐을 뿐인 두 말단 경찰관에게 민형사상 책임을 떠안긴 경찰. 어쩌면 믿음은 수많은 배신들 틈에서 피어나는 생명력 강한 쑥부쟁이인지도 모르겠다. 40년 전, 새벽 기차를 타고 서울로 간 우리 누나들은 창밖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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