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계율
불교의 계율
  • 법원<청주 능인정사 주지 스님>
  • 승인 2017.10.12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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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자의 목소리
▲ 법원

부처님이 앙가국 아파나의 케니야 절에 계실 때의 일이다. 어느 날 해질녘 존자 우다이가 찾아와 문안했다. 부처님은 그에게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물었다.

“저는 아무 걱정도 없으며 안온하고 즐겁습니다. 부처님께서 계율을 정해서 한량없는 악법을 멸하고 한량없는 착하고 묘한 법을 더하도록 해주셨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오후와 밤에는 음식을 먹지 말며, 때아닌 때에는 마을에 들어가 걸식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처음에는 이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냥 지키기만 했는데 나중에는 그것이 저희들을 안온하게 하기 위한 것인 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우다이여. 훌륭하다. 너는 이제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다. 나는 어리석은 사람들을 위해 그것을 끊으라고 말하는데 그들은 곧잘 `이것은 작은 일이다. 끊을 것도 못 된다. 그런데도 부처님은 이것을 끊으라고 한다'며 계율을 하찮게 여기며 도리어 불만을 품는다. 그들은 계율을 지키는 것을 싫어하고 욕심에 결박되어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그러나 현명한 사람은 계율을 하찮게 여기지 않고 그것을 잘 지켜서 욕심에 결박되지 않으며 결박에서 벗어난다…우다이여! 비구는 모든 것을 버리려고 수행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간혹 그 뜻을 잊어버리고는 욕심과 서로 상응하여 사랑하고 즐겨하는 데에 얽매이게 된다. 나는 그것을 속박이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괴로움이라는 뿌리 가운데 있다가 생사가 없는 데서 노닐고, 애욕이 다한 위 없는 경계에서 자유로우면 나는 그것을 해탈이라고 말한다. 무슨 까닭인가? 그에게는 이미 모든 번뇌가 다하였기 때문이다. 우다이여! 즐거움에는 성인의 즐거움과 범부의 즐거움이 있다. 오욕(五慾)으로 인하여 즐거움이 생기면 그것은 범부의 즐거움이요, 욕심을 떠나 초선 내지 4선을 성취하여 노닐면 그것은 성인의 즐거움이다.”(중아함경)

종교가 철학이나 예술, 교육과 다른 점이 있다면 지켜야 할 계율이 있다는 점이다. 모든 종교는 그 종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에게 그 종교의 교의를 반영한 계율을 지킬 것을 요구한다. 불교도 출가수행자나 재가신자에게 계율을 지킬 것을 강조한다. 교단이 정한 계율을 지키지 못하면 추방하거나 자격을 인정하지 않는다. 불교의 출가수행자가 지켜야 할 250가지(비구니 348가지) 계목은 계율을 어겼을 때 어떻게 조치할 것인가가 포함되어 있다.

불교는 다른 종교에 비해 교리나 사상적으로는 배타성이 적은 종교다. 형식과 제도도 까다롭지 않다. 이런 불교도 수행자가 지켜야 할 도덕적 책무인 계율에 대해서만은 엄격하다. 계율은 수행을 완성시켜주는 쉽고 바른 길이기 때문이다.

수행자들이 지켜야 할 계율을 집성해놓은 사분율에는 계율을 제정한 뜻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계율을 지키면 모든 수행자들이 피로하지 않고 편안하게 될 것이다…”

이는 계율이 속박을 위한 굴레가 아니라 안온을 위한 궤도임을 말해준다. 비유하면 미리 서울로 가는 길을 닦아놓고 그 길을 꾸준히 정진하며 가기만 하면 목적지에 도달하게 하려는 것이 계율이다. 출가를 하고 계율을 지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계율 중에는 시대와 사회적 조건에 따라 지킬 수 없는 조항도 있다. 부처님도 “소소계(小小戒)는 버려도 좋다”고 했다. 하지만 수행의 근본이 되는 계율까지 버리면 곤란하다. 자칫하면 `콧물에 빠져 죽는 파리'신세가 될 수도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계를 지키지 않으면 종교적 인격이 성숙해지지 않는다. 파계하고 수행하는 것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나 다름없다. 그런데도 요즘 불교도 중에는 계율을 가볍게 여기는 사람이 너무 많다. 엉터리 불교를 하면 나무에 올라가 고기를 잡으려는 수고만 하는 꼴이다.

계율을 여겼다면 즉시 참회하고 순간순간 자신을 다스리며 자신의 주인으로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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