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과 숨 사이
숨과 숨 사이
  • 이재정<수필가>
  • 승인 2017.08.08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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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 이재정<수필가>

장마가 한차례 세상을 쓸고 지나갔다. 비에 발이 묶여 운동을 못 나간 터라 기다렸다는 듯이 음성천을 나갔다. 물이 줄어 군데군데 고여 있던 웅덩이에 잔뜩 끼었던 녹조가 싹 쓸려가고 맑은 시냇물이 흐르고 있다. 며칠을 퍼붓던 비가 그치고 흙탕물은 가라앉아 고요가 찾아온 음성천이다.

물 한가운데 백로가 고고하게 서 있다. 떼를 지어 있는 물오리에 비해 백로는 볼 때마다 혼자다. 마치 자신의 미모에 자신이 넘치는 당당하고 도도한 모습으로 비친다. 키가 크지 않은 나로서는 잘 빠진 긴 다리가 부럽기만 하다. 백로는 물아래를 오래오래 응시하고 있다. 사색에 잠기기라도 한 걸까. 아니면 사냥할 물고기를 탐색 중인가 보다. 나는 가만 숨을 죽이고 무슨 일이 벌어질까 오래도록 지켜보고 있었다.

갑자기 미동도 않던 몸이 움직인다. 물속으로 들어갔다 나온 부리에 물고기가 물려 있다. 그 광경을 지켜보는 나도 잠깐 숨이 정지되는 느낌이다. 백로의 먹잇감이 된 고기는 몸통을 두어 번 휘두르더니 잠잠해진다. 이어 물고기는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백로는 다시 고고한 모습으로 돌아간다. 긴장해서 불규칙했던 숨이 날숨으로 뿜어진다.

숨은 들숨과 날숨의 반복이다. 숨을 들이쉴 때는 10개의 근육이 사용되고 숨을 내쉴 때는 8개가 사용된다고 한다. 사람의 들숨은 깊이 들이쉬게 된다. 공기를 최대한 많이 몸속으로 들여보내려는 본능이 있기 때문이다. 날숨은 흥분하고 화가 나 있을수록 얕아져서 가빠진다. 그리하여 마음의 평온을 깨뜨려서 불안해지기 마련이다. 이 날숨의 깊이를 잘 조절하고 다스리면 명상이 되는 것이다.

아기가 으앙 하고 울음을 터뜨리는 것도 날숨으로 시작된다. 아기의 폐를 채우고 있던 숨이 나가고 그 자리에 공기가 들어오면서 첫 호흡을 하게 된다. 또한 사람이 운명할 때도 날숨으로 끝을 낸다. 삶의 시작과 끝을 맺는 날숨의 닦음은 수양이 된다. 해녀들이 내는 숨비소리도 날숨으로 그녀들의 호흡을 잘 참아내고 조절한 수양의 결과이지 싶다.

잠이 들면 숨이 멈추어 죽게 되는 희귀병도 있다. 온다인증후군으로 프랑스 설화에서 비롯된 말이다. 요정 온다인은 팔레몬과 사랑에 빠졌다. 팔레몬은 숨쉬는 매순간 온다인을 사랑하겠다고 맹세했다. 이후 팔레몬이 바람을 피워 모든 숨에 사랑을 맹세하고 저버린 그에게 잠에 빠지면 숨을 멈추게 하겠다고 저주했다고 한다.

숨이 멎을 때가 있었다. 아들의 대학입시시험 합격발표를 클릭하는 순간이다. 빨간색의 불합격이 내 눈으로 들어오면서 숨이 막히는 경험도 했다. 숨은 들숨과 날숨의 이어짐이다. 그 이어짐 사이에 정지되는 순간이 있다. 교차의 순간은 0.2초의 여유라고나 할까. 찰나이다. 아주 짧지만 반드시 존재하는 간격이다. 서덕준 시인은 호흡이란 시에서 그 찰나의 멈춤을 “당신을 향한 나의 숨 멎는 사랑이어라”이렇게 표현했다. 숨을 쉬다가 숨과 숨 사이의 간격을 생각한다. 나는 그것을 인연이라 부른다.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끈. 서로 얽혀 실핏줄처럼 연결되어 있는 끈을 숨을 통해 느끼고 있다.

때로는 간격은 애타게 기다리던 기쁜 소식을 듣기 전의, 보고 싶었던 사람을 만나기 바로 그 직전에 느끼는 짜릿한 전율. 나를 숨 멎게 해줄 0.2초의 감전을 매일 꿈 꾸어 본다. 그래서 내일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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