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능과 의식, 탈 원전에 대하여
지능과 의식, 탈 원전에 대하여
  • 정규호<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 승인 2017.08.08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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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단상
▲ 정규호

창의력과 다양성은 내가 선호하는 몇몇 단어들 가운데 빠짐이 없다.

내세울 것 없는 작은 땅, 게다가 반쪽으로 분단된 나라의 형편에서 이만큼이나마 살게 된 것은 우리 국민의 창의력과 더불어 화려하고 다채로운 민족 정서가 큰 몫을 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획일화된 입시 위주의 교육에 크게 낙담하면서 이런 학습구조가 단순하고, 문제 해결을 위한 다양한 접근 방식을 알지 못하며, 따라서 재치 발랄한 창의력도 발휘되기 어려울 것이라는 한탄을 했던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창의력과 다양성은 끊임없는 학습, 즉 지식의 함양이 바탕이 된다.

“<그렇게 보임>과 <정말 그러함> 사이의 구별, 즉 외양과 실재의 구분은 수 세기 동안 철학자들의 화두였다. 철학자들은 이 문제를 인식론적 구분이라고 부른다. 진정성 여부는 어떤 진실에 대한 우리 지식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캐나다의 철학자 앤드류 포터의 <진정성이라는 거짓말>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나는 유발 하라리의 질문, `지능과 의식 중에 무엇이 더 가치 있을까'에 매몰된다.

무엇이 됐든 기본적인 것을 외우고 있음은 지식을 쌓아가는 것이고, 그 지식의 축적이 인간 지능의 척도가 될 것이다. 그런 지능을 통해 사고력을 갖추는 토대를 구축하면서 창의력과 통찰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경지를 `의식'의 영역으로 상정할 수 있겠다.

원전, 원자력발전을 둘러싼 찬반 대립이 뜨겁다. 그 뜨거움으로 인해 서론부터 팍팍하게 시작되는 글쓰기가 참으로 아련하다.

편리와 폭력의 극단에 놓여 있는 핵물질과의 별리(別離)는 당연히 당대의 문제이면서 후세의 문제이기도 하다. 융성할 수 있고, 극단의 폐망이 위험스러운 지경인데, 찬반의 와중에 그저 먹고사는 일과 전문가로서 잘 먹고 사는 일에 대한 집착의 차이는 크다.

“인간은 힘을 가지는 대가로 의미를 포기하는데 동의한다.”는 유발 하라리의 말은 원전, 즉 핵물질의 폐해에 대한 무의식적 경외에 대한 경고일 수 있다.

반면에 원전 제로화를 희망하는 사람들 앞에 황망하게 서 있게 된 원전 노동자들의 고뇌에는 탈 원전의 논의 자체가 안전과 생존의 아슬아슬함이라는 위기가 있다.

원자력(핵)발전 전문가와 탈핵 활동가 사이에 위태롭게 놓여 있는 노동자들의 중간성에 비무장지대는 없다.

다만 지식(지능)이 충만한 전문가와, 의식이 팽배한 활동가 사이의 간극에 지금이거나 미래의 사람의 가치가 어느 만큼 존중되고 있는지는 애써 따져볼 일이다.

하이에크는 `빠른 결실을 보려는 성급함'때문에 일부 사람들이 `자유 사회의 자생적 힘'을 거부하고, 그 대신 `의도적으로 선택된 목표를 위해 모든 사회적 노력에 대한 집단적이고 의도적인 지휘'를 제안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윌리엄 이스털리. 전문가의 독재에서 재인용)

탈 원전을 둘러싸고 사람이 존중되고, 사람은 전문가를 신뢰할 수 있는 사회가 얼마나 쉽지 않은 일임을 알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녹조라떼>로 사람과 자연을 위협하고 있는 4대강 사업을 찬양했던 전문가들 가운데 제대로 된 반성의 목소리를 내는 용기를 나는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숨기거나 감추는 일 없이, 또 `지식(지능)'과 `의식'이 어우러지는 원전 공론화가 충실하게 이루어지는 일은 또 하나의 개혁이자 적폐청산이다. 그람시는 말했다. “위기란 바로 낡은 것이 죽어가고 있지만 새로운 것이 태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에 있다.”

지금 편하자고 나중을 죽게 할 수 없는 일. 원전이나 자식 키우는 일이 다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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