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킬 수 없는 길
돌이킬 수 없는 길
  • 권재술<물리학자·전 한국교원대 총장>
  • 승인 2017.07.06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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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칼럼-시간의 문앞에서
▲ 권재술

“달밤에 고향 길 바라보니/뜬구름만 흩날리며 돌아가고 있네.”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에 나오는 시의 한 구절이다. 왕오천축국전은 15세에 중국으로 건너간 혜초가 4년 동안 인도의 다섯 천축국을 포함한 40여 나라를 돌아보고 기록했다는 여행기다. 일부만 남아 있어 다행이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지만 자동차도 없던 시절 그 고생이 어떠했을까, 상상이 가지 않는다.

사람들이 자동차를 왜 발명했을까? 아마도 먼 길을 빨리 가서 더 많이 놀고 싶어서 그랬을 것이다. 자동차가 없었던 시절, 대다수 사람은 걸어다녔다. 사람마다 자동차를 갖게 된 지금은 전국이 일일생활권이 됐다.

먼 길을 빨리 가게 된 현대인은 그래서 어떻게 됐는가? 자동차가 나와서 빨리 가게 됐지만 현대인은 더 바빠졌고, 많은 사람을 만나지만 진정한 만남은 더 줄어들었다. 그렇다고 자동차로 인해서 삶의 질이 더 좋아진 것도 아니다. 먼 길을 빨리 가서 더 많이 놀고 더 편해지고 싶었던 인간의 꿈은 여지없이 깨지고 말았다.

컴퓨터는 어떤가? 컴퓨터를 처음 발명한 사람도 아마 복잡한 계산을 빨리해 버리고 더 많이 놀고 싶어 했을 것이다. 컴퓨터가 나오고 그래서 더 놀게 됐는가? 더 복잡한 계산을 빨리 끝내면 한가해질 줄 알았는데 계산해야 할 일은 더 많아지고 사람들은 더 바빠졌다.

자동차, 컴퓨터, 휴대전화… 수없이 많은 문명의 이기들이 사실은 어려운 일을 빨리 끝내고 여가를 즐기기 위함이었는데, 여가는커녕 더 바빠지고 삶의 질은 더 악화됐다. 이제 자율주행차가 나오고, 왓슨 같은 진단 로봇이 나오고, 알파고 같은 인공지능이 나오게 됐는데 그러면 좀 더 한가해질까? 그렇지 않다는 것은 이미 증명되었다. 수많은 문명의 이기들이 등장했어도 인간은 더 바빠지고 생활은 더 여유가 없어지고 삶의 질은 더욱 팍팍해졌다. 비록 많은 미래학자가 유토피아를 예언한다고 해도 그렇게 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런데 이러한 빠르기 경주가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인간이 그러한 빠르기에 적응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인간은 감각기관을 통해서 변화를 감지하고 변화에 대응하게 된다. 기온이 변하면 생체가 이에 반응하여 적응하고 무엇이 달려오면 피하게 된다. 변화가 빠르면 이에 맞추어 인체도 빠르게 반응하게 된다. 하지만 인체의 반응 속도에는 한계가 있다. 반응하기 위해서는 감각이 뇌에 전달되고, 뇌의 명령이 손발 같은 말단 기관으로 내려가야 하는데, 이 신경전달 과정에는 시간이 걸리게 된다. 이 신경전달에 필요한 시간보다 빨리 반응해야 할 현상이 생기면 사고가 난다. 정신현상에서도 마찬가지다.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 주어진 시간이 필요한 시간보다 짧으면 잘못된 판단을 내리게 되고, 그 결과는 매우 심각하다. 이런 현상이 반복되면 인간은 정신적인 문제가 생긴다. 현대병이라고 하는 정신병은 결국 이 변화의 빠르기에 적응하지 못한 데 그 원인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문명의 이기들의 이러한 역작용을 알고 이를 개선할 가능성은 있을까? 변화의 속도를 인간의 속도에 맞도록 좀 더 느리게 가는 자동차, 좀 더 느린 컴퓨터를 만드는 방향으로 갈 수 있을까?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자동차는 점점 더 빨라질 것이고 컴퓨터의 성능은 점점 더 좋아질 것이다. 빨리 마치고 더 많이 놀려고 했던 인간의 희망은 한갓 꿈이었을 뿐이다. 결국 우리 문명은 인간이 기계를 조정하던 시절에서 기계가 인간을 조정하는 시대로 가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가던 길을 돌이킬 수 없다. 불나방은 그것이 뜨거운 불이라는 것을 모르면서 달려가지만 인간은 그것이 파멸이라는 것을 알면서 달려가고 있다. 자기가 만든 불 속으로 뛰어드는 불나방, 그것이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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