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루터기
그루터기
  • 안희자<수필가>
  • 승인 2017.06.15 19:5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生의 한가운데
▲ 안희자

주말이면 집 주변에 있는 야트막한 산을 찾는다. 걷는 것이 건강에 좋다는 뉴스를 접하고 난 후의 일이다.

그곳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낯선 사람들로 붐볐고 나도 그들 사이에 끼어들게 되었다. 그러나 산을 오르는 일도 일심동체가 되어야 하나보다. 마음만 앞설 뿐 걷는 속도가 굼뜬 나는, 이내 그 무리에서 빠져나온다.

산길은 좁다. 뒤 따라 오는 이에게 길을 내어주고, 나는 잠시 벤치에 앉아 가쁜 호흡을 고른다. 그런데 먼저 산에 오른 사람들은 어느새 바람처럼 휘돌아 내려온다. 그들이 부럽다는 생각에 한동안 산에 오르는 일이 버거웠다. 하지만 그도 잠시, 숲의 향기에 마냥 취해보고 싶었다.

천천히 즐기며 걷는다. 느리게 산다는 건 누리고 산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다 보니 숲 속 풍경이 절절이 눈으로 흘러 가슴으로 스며든다.

산에서 만나는 생명들이 전과 같지 않다.

나뭇가지 사이로 부서지는 햇살은 사랑의 빛이며 산새 소리는 환희의 노래요, 풀꽃 향기도 달큰하게 젖어든다. 그러다 내 마음의 빗장도 활짝 열어젖히고 산모롱이에 풀어놓는다. 산이 주는 선물이다.

어느 날이었다. 중턱의 아름드리 소나무 아래서 그루터기를 발견했다. 잠시 위에 걸터앉아 보았다. 의자에 앉은 듯 편안하다. 누구도 편견 하지 않고 자신을 다 내어주는 영락없는 어머니의 너른 품이다. 그 후 다시 찾은 곳은 놀랍게도 회춘한 듯 화기가 감돌았다. 나의 쉼터인 그루터기에 여린 새순이 돋아나고 있었다. 오직 밑동만을 꼭 붙들고 버텨온 세월이다.

나뭇가지가 잘려나가고 몸통마저 베여 오욕칠정(五慾七情)도 다 놓아버린 줄 알았는데, 어찌 아픔을 훌훌 털고 일어나 움을 틔울 생각을 했을까?

나는 여태껏 나뭇등걸은 흙속에 묻혀 그냥 사라지는 걸로 알았다. 순간 끌어안은 그들 몸체에서 환한 빛이 일었다. 세상의 모든 어미가 그렇듯이 혹독한 산고를 겪고 태어난 아기와 나누는 출산의 기쁨이 아니던가.

나무도 사람을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그것은 마치 산모가 오랜 진통 끝에 얻는 고귀한 생명, 자식과도 같았다. 이는 인간의 원초적 본능이자 잉태한 여인이 뱃속에 고이고이 품어 산고를 치른, 숭고한 어머니의 자태가 아닌가 싶다. 강인한 생명력으로 솟아오른 녹색 잎이 경이롭다. 상처의 아픔을 새살로, 오직 사랑으로 뿌리내린 것이다.

숲 속 나무들은 온갖 시련 속에서도 세상 모두를 끌어안으니 삶에 지친 이들에게 희망이 되는가 하면, 남은 그루터기조차도 평온한 쉼터를 제공한다. 또한 높은 자리에 있어도 겸허하다.

우리의 삶도 원하지 않아도 산처럼 가파르게 오르고 내리는 일이 어디 한 번 뿐인가. 세상살이의 갈등으로 부딪힐 때마다 우리는 현실을 마주치기보다 정작 꼬리를 감추려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숲 속 생명들은 이 모두를 자연의 섭리라 이르며 묵언 수행하고 있다.

돌아보면 난 허울 좋은 나무로 살아왔다. 쓸데없는 집착과 욕망의 더께로 굳어진 나 자신의 표피를 이제는 벗어버리고 싶다. 그러면 촉촉한 수액이 고여 한층 부드러워질 것이고 내 영혼도 맑아지리. 생의 그루터기처럼.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