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밥
종이밥
  • 이지수<청주 중앙초 사서교사>
  • 승인 2017.05.15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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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서가 말하는 행복한 책읽기
▲ 이지수

대략 십오년 전 처음 만났던 그대로 책에선 여전히 흙냄새가 난다. 표지그림이 그렇고, 누르스름한 책장이 그렇다. 무엇보다 넘기는 대로 폴폴 날리던 소소한 감동도 그대로다. 올해 큰아이 반에서 진행되는 독서 골든벨 지정도서로 선정되어 아이와 함께 다시 읽어보았는데, 오랜 친구와 만나는 느낌이 이럴 듯하다.

바로 김중미 작가의 두 번째 작품 `종이밥(낮은산)' 얘기다. 입을 삐죽 내민 채 땅바닥을 내려다보는 송이, 방안에서 곰돌이 푸를 그리고선 뒤돌아서 앉아있는 송이, 땅만 보고 뛰어가는 송이…. 송이는 2017년에도 여전히 사랑과 관심이 필요한 다양한 가정 속의 아이를 대표한다.

사고로 일찍 돌아가신 엄마 아빠를 대신해 연로한 조부모님과 오빠와 사는 송이다. 응석은 곧 철없음이 된다. 송이가 놀아달라고 투정부리기에는 하루하루의 생계유지를 위해서는 몸이 불편한 할머니와 할아버지도 모두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 한다. 더구나 이마저도 조금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아 얼마 후에 송이는 학교 입학 대신 밥술이나 먹을 수 있게 산속의 절로 보내질 예정이다. 이 사실은 꿈에도 모르고 천진하게 입학식을 기다리며 새 옷과 곰돌이 푸가 그려진 새빨간 가방을 갖고 싶어 하는 송이의 모습은 가슴을 아리게 한다. 오빠마저 학교로 등교하고 나면 혼자 남은 송이는 텅 빈 방안에 앉아 종이를 씹는다. 그러니까 이 책의 책 제목은 은유나 비유가 아니라 진짜 `종이밥'의 그 종이다. 그러나 종이를 씹을 때의 송이의 모습은 단순히 어둡고 슬프지만은 않다. 동시숙제로 고민하던 오빠가 송이의 말을 듣고 후딱 쓸 수 있었듯이, 송이는 오히려 종이가 밥풀과 껌을 씹는 것 같다며 좋아한다. 비록 주전부리나 배고플 때 마땅한 요깃거리가 없어서, 심심해서 종이를 씹을지는 모르지만 그걸 즐기는 송이의 천진한 모습은 차라리 다 지난 오늘보다는 시작될 내일에 더 희망을 갖게 한다.

이야기는 송이에게 빨간 곰돌이 푸 가방을 꼭 사주고 싶었던 할아버지가 무리해 시장 좌판에 나섰다 병세가 악화하며 고비를 맞는다. 결국 송이는 도리 없이 절로 보내질 것이며, 철이는 송이를 절로 보낸 할머니를 그리고 어려운 가정환경을 탓하며 자라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다 언제나 생활력 강하고 잘 울지 않던 할머니가 새벽녘 염주 알을 굴리며 우는 모습을 우연히 보게 된 철이가 몰래 짓던 눈물과 독백 장면이 나온다. 이 장면은 철이의 할머니에 대한 오해와 미움의 해소에 앞으로 더욱 단단해질 가족의 모습을 엿볼 수 있기에 차라리 다행이다 싶어진다.

송이 없이는 살 수 없을 것 같은 오빠 철이, 연로한 자신들이 세상을 떠난 후 어린 송이가 걱정되어 미리 절에 보내려던 할머니, 그 송이를 한없이 안쓰럽고 미안한 마음으로 대하는 병든 할아버지. 이 모습은 비록 이 가족에게는 경제적 풍족함은 없지만, 사랑과 배려가 가득한 따뜻한 가정이라는 점이 더욱 부각된다. 가족 간의 애정에 대한 재발견은 그토록 원하던 곰돌이 푸 가방에 옷을 바리바리 넣어 할머니와 절로 떠나는 송이의 모습에도, 잠시의 헤어짐이니까 기다릴 수 있다는 성숙한 시선도 갖게 한다. 물론 그렇게 떠난 송이가 불과 며칠 만에 할머니와 다시 집으로 돌아온 장면에서는 기쁨의 괴성을 지르기도 했지만 말이다.

가족은 함께 있어 가족이고, 곁에 머물러 웃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따뜻한 존재다. 주말부부로 살았던 우리도 곧 함께 산다. 장거리 출퇴근에 길거리에 버리는 시간과 돈보다 더 소중한 것은 곧, `함께 있음'이라는 것을 우리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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