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에게
J에게
  • 김희숙<수필가·원봉초병설유치원 교사>
  • 승인 2017.02.02 20:2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生의 한가운데
▲ 김희숙

어둠이 녹아내린 새벽 거리를 헤집고 율량동으로 향했다. 공항으로 가는 길목에서 그녈 태우기로 한 것이다. 제천에서 온 그녀가 딸의 자취방에서 날 기다리기로 했다. 그녀를 태우고 공항으로 갔다. 우동과 김밥으로 허기만 간단히 지운 채 비행기에 올랐다. 창가에 자릴 잡은 그녀의 귀에 대고 그동안 쌓인 이야기를 풀었다. 지난여름에 보고 6개월 만에 만나는 그녀다. 항상 변함없는 그녀와 이런저런 수다를 나누며 꽤 시간이 흘렀음에도 비행기가 이륙하지 않았다. 몸이 뒤틀리고 있을 즈음 기내에서 안내방송이 나왔다. 안개 때문에 비행기가 뜰 수 없으니 기다려 달라는. 창밖을 보니 뿌연 안개가 술 취한 불한당처럼 활주로 위에 사지를 벌린 채 질펀하게 누워 있었다.

그리고 세 시간, 안개는 여전히 물러날 기세가 없었다. 전원 하기하라는 기내 방송이 나오고 우리는 전원 비행기에서 내렸다. 그리고 게이트에서 다시 기다리기를 두 시간, 사십 분이면 도착할 제주도를 안개의 심술로 다섯 시간 째 공항에 발목이 잡혀 있었다. 드디어 다섯 시간 반을 기다려 제주행 비행기를 다시 탔다. 하루가 심하게 틀어지고 있었다. 그녀와 나는 새벽 비행기를 탄 후 제주공항에 도착하면 공항에서 바로 한라산으로 이동해서 등반하기로 일정을 잡았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하게 공항에서 다섯 시간 반을 묶여 있었으니 한라산은 포기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새벽에 잠을 설친 탓인지, 전날 제천에서 온 탓인지 그녀는 창밖을 보는가 싶더니 고개를 내 어깨에 떨군 채 꾸벅이고 있었다. 꾸벅이던 그녀가 이내 코를 골기 시작했다. 그녀에게 담요를 덮어주며 창밖을 본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일 때문에 하루가 뒤틀린 것을 생각하니 황당했다. 누구나 이렇게 인생에서 예기치 못한 일들이 있을 것이다. 예고 없는 사고 예고 없는 병마의 습격 등.

문득 J의 얼굴이 창밖에서 어른거린다. 누구보다 건강했던 J가 유방암에 걸렸다는 소식을 얼마 전 접했다. 깜짝 놀라 J를 찾았을 때, 그녀는 이미 유방을 도려냈다고 했다. 등판을 절개해서 앞으로 옮기며 보형물을 삽입하여 재건 수술을 했다고. 이제는 괜찮다며 웃던 J. 장애인 등록을 하러 병원에 서류를 떼러 간다며 애써 웃던 J가 자꾸 떠오른다. 얼마나 당혹스러웠을까 창창한 나이에 예기치 않은 일이 닥친 J는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었을까. 그래도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라고 J에게 위로 아닌 위로를 했었다.

어느새 비행기는 공항에 도착했다. 제주의 세찬 바람이 내 온몸을 때렸다. 해안 도로를 달려 서귀포로 들어섰다. 제철을 맞아 흐드러진 동백꽃 사이로 예기치 못한 유채꽃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괜찮다고 손을 흔들던 J의 모습이 저만치서 흔들리고 있었다. 가끔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꽃이 핀다. 예상치 못한 꽃이 겨울을 이겨내고 핀 모습이 더 아름답다. 추위에 피어난 유채꽃처럼. 예기치 못한 병마를 맞아 뜻밖의 날들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있는 J를 위해 두 손을 모아본다. J 앞날에 예상치 못한 행운이 함께 하길….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