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의 발자취를 찾아서 <52>
기독교의 발자취를 찾아서 <52>
  • 충청타임즈
  • 승인 2007.01.03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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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 신평성당
모진 박해 속 꿋꿋이 지킨 신앙 어진 순교자 고결한 넋 기리며…

신준수 객원기자

▲ 2000년 신축한 새 성전. 매서운 바람은 초행길에 들어선 사람들을 더욱 주눅들게 한다. 신평성당을 찾아가는 날이 그랬다. 옷깃을 여밀수록 가슴을 파고드는 바람. 낯선 도시, 이리저리 한참을 헤매고 나서야 신평성당을 찾을 수 있었다. 반가움에 앞서 와락 눈물이 쏟아졌다. 누가 볼세라 성당안으로 들어가 순교자들을 위한 기도를 올린 뒤 안도감과 함께 한참을 그렇게 앉아 성당 내부를 둘러 보았다. 상성규 화백이 직접 조각했다는 십자고상, 신자들이 기증한 참죽나무 십자가와 은행나무로 조각한 예수상이 있다. 제단 벽면은 상성규 화백이 흙으로 제작해 1100도의 고열로 구워낸 도자기로 모자이크 처리돼 있다. 밖으로 나왔을 땐 간간이 눈발이 날렸다. 180년 전 최초로 교우촌 형성 충남 당진군 신평본당은 충청남도의 관문인 삽교천과 신평면 일대를 관할구역으로 하고 인근에 솔뫼성지, 해미 순교성지가 있는 본당이다. 신평면에 최초로 교우촌이 형성된 것은 약 180년 이전, 당시 신평본당 관할구역 내에는 몇몇 교우촌들이 밀집되어 있으며, 순교자 박마르코, 박마티아를 모신 신심깊은 본당이다. 현 당진군 신평면 한정리 원머리 새터, 용성은 병인박해때는 이미 교우촌이 형성되어 있었던 곳으로 염전과 논농사를 주로지으며 살던 곳으로 박씨, 조씨 일가가 박해 때 복음을 전파함으로써 교우촌이 형성된 곳이다. 하지만, 요즘은 교우촌의 영화는 찾기 힘들다. 한 때 500가구 이상이 살았던 마을이 이농현상과 노령화로 지금은 60~80대 노인들만이 성당을 지키고 있을 뿐이다. 더우기 요즘은 도시개발을 앞두고 인심까지 흉흉해지고 있다는 소문으로 스산함마저 감돈다.  순교자 박마르코(선진), 박마티아 ▲ 새 성전을 건축하면서 이장한(박마르코, 박마티아) 순교자의 묘.

한국 초기교회 공동체들이 심한 박해를 받을 무렵(1801년), 서울과 수원지역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박씨들이 모진 박해를 피해 숨어살기 좋은 원머리(현 신평면 한정리)로 이주해 염전을 개척해 소금장사를 하며 신앙을 지켰다.

1866년부터 시작된 병인박해의 영향이 이곳 원머리에까지 이르러 2년 후(1868년) 박마르코(선진), 박마티아는 신자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살아남은 교우들도 비참한 생활을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먹을 식량이 부족해 간신히 하루하루 연명하며 살아야 했다. 그러나 이들은 마을을 떠나지 않고, 서로 먹을 것을 나누고 기도하며 신앙을 지켰다.

당시 그의 집안은 세간이 있고 본읍에서 권세도 있었다. 수원으로 잡혀갈 때 그는 부모에게 "거사가서 죽으면 육정의 박절함이 없을까만은 주 명대로 위주하여 죽는 것이 구령에 편한 일이라. 부디 염려 마시고 훗날을 조심하십시오"라고 하직인사를 하고 그의 사촌 마티아와 함께 수원 옥에 갇혔다.

수원에서 고문을 다할 때 마티아가 이를 못이겨 배교하려 하자 마르코는 "대주를 배반하고 영벌을 받으려 하느냐"고 깨우침을 주어 마티아는 배교함을 뉘우쳤다고 전해진다. 옥에 갇힌 지 15일 후 포교들은 그들을 교(絞)하여 사망했다. 이때 마르코의 나이는 33세였고, 그의 사촌 마티아의 나이는 50세였다.

그후 순교자의 유해는 순교 후 외교인의 도움으로 원머리에 안장했는데, 1989년 4월 4일 현 신평성당내로 이장됐고, 신평본당은 2000년 새 성전을 신축하면서 묘역을 다시 정비했다.

 순교자 현양비 비문

순교자 박선진(말구)과 박마지아는 원머리(현 신평면 한정리)에서 출생하였으며 종형제이다.

1868년 체포 후 15일만에 순교

원머리에는 박해시대인 1850년대에 이미 교우촌이 형성되었고, 박말구의 부친은 외교인이었으나 모친이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입교하였으며, 모친의 뜻을 따라 착실히 수계하면서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일부 외교인들의 방해로 마음놓고 신앙생활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1868년(무진년) 포교에게 체포되어 수원 감옥에 갇혔으며, 옥에 갇힌지 15일 후 순교하였는데, 그 때 박말구는 33세였고, 박마지아는 50세였다. 순교 후 외교인의 도움으로 그 시신을 찾아 원머리 박씨 집안의 땅에 안장되었다가 1989년 4월 4일 신평 성당내로 이장하였으며, 2000년 새 성전을 신축하면서 묘역을 다시 정비하였다.

   
▲ 성당내부 모습.
박말구가 수원으로 잡혀갈 때 부모에게 하직인사를 드리면서 "천주님의 뜻대로 천주님을 위하여 죽는 것이 영혼을 구하는 일이니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라고 위로하였다. 또한 박마티아가 모진 고문을 못 이겨 배교할 뜻을 비치자 "주님을 배반하고 영원한 지옥벌을 받으려 하느냐"고 깨우쳐 함께 순교하니 그 믿음은 모든 신앙인의 귀감이 될 것이기에 여기 현양비를 세워 그 높은 정신을 기리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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