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장과 광장
김장과 광장
  • 정규호<문화기획자·칼럼리스트>
  • 승인 2016.11.22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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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단상
▲ 정규호

김장을 담갔습니다. 겨우내 먹고살 일을 준비한 것이지요.

아내와 함께 절임배추를 사다 풀어헤치고, 갓이며 쪽파(올해는 유난히 쪽파가 비쌉니다)와 무, 고춧가루, 새우젓 등 갖은 양념을 서둘러 준비한 뒤 더는 참지 못하고 거리로 나왔습니다.

토요일, 거리에는 뜻밖의 사람들이 몰려나와 길을 광장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한껏 멋을 낸 젊은 처자를 비롯해 엊그제 대입 수능시험을 마친 고등학생과 어린아이와 함께 나온 가족들, 그리고 갈수록 커지는 후회와 반성으로 풀죽은 어르신들의 모습도 보입니다.

반대하고, 분노하며 거리로 뛰쳐나와 목소리를 높이던 평소의 집단시위와는 다른 뜻밖의 평범한 사람들이 광장으로 바뀐 그곳에서 촛불의 물결을 만들고 있습니다.

집집마다 김장을 하는 일은 먹고사는 일, 그저 지극히 당연한 삶의 모습입니다. 이때쯤 도회지로 분가해 살면서 한 삽, 구덩이를 팔 수 있는 흙조차 찾을 수 없는 자식들은 김장을 돕는다는 이유로 부모님 댁을 찾습니다. 양념에 잘 버무린 김치 속살에 뜨끈한 수육을 곁들여 이야기꽃을 피우고, 바리바리 한겨울을 날 양식을 싸들고 각자의 집으로 뿔뿔이 흩어질 것입니다.

훌쩍 커버린 자식들 진학 걱정과 취업걱정, 그리고 뒤늦은 혼사 걱정으로 일상을 보내는 필부필녀에게 김장은 말 그대로 먹고사는 고단함에서의 소소한 행복이며 기쁨입니다.

그런 지극히 평범하고 순수한 이들이 나라가 부끄럽고, 또 나보다는 내 자식들, 그다음 세대에게 떳떳한 세상을 물려주고 싶다는 간절함으로 김장을 뒷전으로 미룬 채 광장으로 서둘러 나와 촛불을 밝히면서 목이 터져라 외치고 있습니다.

아아! 거기에서 전인권의 애국가를 들으면서 아플 만큼 가슴이 저린, 그리하여 뜨거운 눈물이 제멋대로 흐르는 절절함을 온몸으로 느끼면서 세상을, 그리고 우리가 사는 대한민국을 회한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 돌아가신 신영복 선생님은 <담론>이라는 책에서 “우리가 일생동안 하는 여행 중에서 가장 먼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여행'이라고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도저히 어쩌지 못하고 어쩔 수 없는 무력감과 회한에서, 그리고 이토록 파탄지경에 이른 나라를 깨우치겠다는 소망으로 물결로 넘실대는 힘을 만들면서 자유로운 의사 결정에 대한 존엄성을 외치고 있습니다.

뉴타운에 현혹돼 일확천금을 꿈꾸었던 욕심을 반성하고, 서슬 퍼런 독재 대신 경제의 기적에 호도되면서 흉탄에 부모를 모두 잃은 동정심에 흔들려 표를 던졌던 순간의 머리회전을 뼈저리게 뉘우치는 안간힘이 광장의 촛불에는 장엄하고 평화롭게 넘실대고 가슴을 덥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촛불로 광장을 수놓은 우리는 아직도 스스로 상식을 대변한다고 여기는 가장 비상식적인 사람과 맞서고 있습니다.

전혀 겸손하지 않고 절대로 진실을 말하지 않으며, 자신의 가치와 의미가 나라와 국민에 있음을 전혀 알지 못하는 이들과 우리는 여전히 맞서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싸움은 길어질 것입니다. 우리의 평범한 기쁨을 알지 못하는, 그리하여 언뜻 `짐이 곧 국가'라는 봉건과 독재의 기억과 청와대와 대통령이 제 집이거나 가업쯤으로 여기는 생각을 바꾸는 일이 쉽지는 않겠지요.

긴 겨울을 무사히 보낼 김장을 하듯 어쩌면 더 크고 더 기다란 촛불을 켜야 할, 고단한 11월이 흐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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