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시와 땡감 (2)
홍시와 땡감 (2)
  • 임현택<수필가>
  • 승인 2016.11.21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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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임현택

시골 친정집에는 오래된 감나무가 있다. 반쪽은 썩어 시커멓게 구멍이 뚫려 속이 훤히 들어다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수령을 알 수 없는 고목 같은 감나무에 여전히 감이 열린다. 감나무 아래는 낡은 의자와 그 옆에는 이름 모를 그루터기가 아버지 쉼터인 냥 의자처럼 턱 하니 버티고 있다. 오랜 세월 아버지와 동행 한 그루터기는 반들반들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세월을 켜 안고 있다. 그렇게 손때 묻은 의자와 그루터기에 앉아있으면 부모님 향기가 있어 참으로 편안하다.

칼바람이 일던 어느 해, 갑작스런 안면마비로 친정아버지는 병원에 검사를 받게 되었다. 그날따라 가늘어 보이는 팔뚝에 커다란 주삿바늘로 채혈을 하고 어설프고 서툰 몸짓으로 이방 저방 다니시면서 온갖 검사 끝에 시든 꽃처럼 침상에 쓰러지듯 누우셨다. 병원 침상 아래 아버지 손등처럼 쭈글 거리는 온기 잃은 낡은 구두가 주인처럼 한쪽은 침상 속으로 다른 쪽은 뒤집혀진 체 널브러져 있었다. 순간 아버지의 아픔보단 짜증이 울컥하고 치밀어 올라왔다. 아버지 구두는 진정 검은색 구두이건만 얼마나 낡았는지 뒤축이 회색을 띠고 안쪽은 논바닥처럼 쩍쩍 갈라져 있었다. 자식이 뭔지 그 싸 빠진 구두 한 켤레를 못 사신고 저리 궁상스럽게 사시나 싶어 속이 뒤집힌다. 노인들의 삶이 아무리 대문 밖이 저승길이라 해도 호사는 아닐지라도 무엇을 위해 저리 궁핍하게 사실까, 원망은 눈앞을 뿌옇게 만든다. 헐거워진 낡은 아버지의 구두가 자꾸만 눈에 밟혀 아버지 아픔보다 더 아픔에 눈언저리는 자꾸만 일렁인다. 부모보다 내 식구 챙기기에 더 급급했고, 유행이 지났다고 신발장 구석으로 밀쳐진 색색가지 구두와 운동화들, 그것도 모자라 철철이 사고 또 사들였던 나다.

생전, 어머닌 땡감도 떨어지고 익은 감도 떨어진다고 늘 말씀하셨다. 투병 중 어머니는 홀로 남겨질 아버질 염두에 두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당신이 지병으로 생과 사를 넘나들면서도 아버지 걱정하시는 모습에 그때에는 참으로 못마땅했다.

그런데 불길한 예감은 항상 적중한다 하지 않던가. 비록 땡감은 아니지만 홍시도 아닌 덜 익은 홍시가 떨어지고 만 것이다. 그렇게 세월이 훑고 간 자리엔 촛불 같은 여린 노인만 있을 뿐 아버진 없었다. 머리 허연 아버질 할아버지보다 언제나 우리에겐 아버지였음에도 세월이 아버질 할아버지로 돌려놓았다. 언제나 그 자리에 계신 줄 착각하고 할아버지란 우리와 상관없다고 외면하듯 부질없는 생각에 그렇게 무신경하게 지내왔던 것이다.

언제나 아픈 손가락인 나, 늘 속만 태우고 살아온 나다. 선조들은 자식은 부모를 원망할 수 있어도 부모는 자식을 원망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 마른 논에 물들어 가는 것과 자식 입에 밥 들어가는 것만 보아도 배가 부르다는 어르신들, 아버지 역시 그러했겠지만 구두를 보고 있노라면 서릿바람보다 더 시린 것이 자꾸만 명치끝을 아리게 찔러댄다. 모로 누워 어깨를 들썩이며 잠든 아버지 모습은 점점 작아 보였다. 생전 어머니는 사람의 뒷모습이 보이기 시작하면 철이 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늘 땡감 같은 내가 사람의 뒷모습이 제대도 보이기는 하는 걸까.

담벼락에 반은 썩어 음에도 여전히 감이 열리는 것처럼 아버지도 툭툭 털고 일어나실 거야를 되뇌며 구두를 한쪽으로 모았다.

퇴원을 하고 눈에 밟히는 낡은 구두 때문에 볼멘소리로 잔소리 아닌 잔소리를 쏟아내자, 중년이 된 자식임에도 주머니 사정을 염려하여 유명 브랜드는 무겁다며 한사코 읍내 구둣가게를 고집하신다. 뜨락에 엉거주춤 벗어놓은 낡은 구두, 비스듬히 닳아 버린 뒤축이 삶의 무게만큼 무겁게 내려앉아 또 울컥해진다. 새 구두를 장만했건만 여전히 새 구두는 신발장 안에서 특별한 날에만 바깥바람을 쏘인다.

까치밥만 더러더러 남아있는 감나무, 비바람에도 굳건하게 버티고 있는 그루터기가 어느 날부터인가 아버지가 아닌 할아버지와 다시 온기를 느끼며 동행하고 있다.그루터기에 묻어나는 그 숨결, 그 향기와 체취는 아버지였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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