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청봉에 올랐다
대청봉에 올랐다
  • 김용례<수필가>
  • 승인 2016.11.17 18:0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生의 한가운데
▲ 김용례

종아리가 뻐근하다. 몸은 천근이지만 벅찬 감동으로 가슴이 뜨겁다. 긴 대하소설의 마지막 장을 넘긴 기분이다. 더 늦기 전에 한번은 해야겠다는 생각을 몸으로 실행했다. 설악산의 중심부 대청봉 1708미터다. 장장 열여섯 시간을 걸었다. 무모한 모험이었다. 그러나 해냈다. 해냈다는 뿌듯함으로 만족하다. 혹자는 그깟 대청봉 갔다 온 것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이냐고 할지 모른다. 각자 느끼는 감정이 다르니 그도 나무랄 수는 없다. 남편의 특별한 생일행사로 대청봉에 올라 보자 하여 따라나섰던 길이다. 설악산은 큰 산이다. 많은 것을 품었다.

설악산의 첫 걸음은 여고시절 수학여행이다. 그 후 여러 번 다녀왔다. 흔들바위, 울산바위, 비선대 작년에 케이블카를 타고 권금성에 올랐다. 힘들다는 생각을 안 했었다. 이번에 설악산의 진면목을 본 것이다. 큰 산의 힘을 유감없이 보았다. 출발할 때는 날씨가 화창했다. 그런데 대청봉까지 한 시간을 남겨두고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날씨가 변화무쌍할 거라는 예상은 했지만 당황했다. 대청봉에 오르니 축복처럼 눈이 쌓였다. 첫눈이다. 중청봉대피소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밤새 바람 불고 눈이 내렸다. 새벽에 나와 보니 겨울 한복판처럼 눈이 쌓이고 추웠다. 어둠이 채 가시기도 전에 중청봉대피소를 나 왔다. 아이젠을 신고 조심조심 걸었다. 내려오는 길도 만만한 곳이 없었다. 오르내리는 길은 까칠하고 거칠다. 3시간쯤 내려오니 눈이 없다. 다시 날씨는 언제 눈이 왔었는가 싶게 화창하다. 능선의 암석봉우리들이 다 들어나 능선의 풍경을 유감없이 보았다. 비경이다. 힘들게 오른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미국에만 있는 줄 알았던 그랜드 캐니언이 설악산 속에 있고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가 그대로 그려져 있다. 험준한 길을 함께 오르며 대자연의 위대함, 육체의 한계점을 느꼈다. 걸어왔던 길처럼 내려가는 길에서도 서로 배려하며 한 발짝 한 발짝을 조심스럽게 옮겼다.

옥빛으로 투명한 물길에 몸과 마음이 덩달아 투명해진다. 기암절벽 진경산수 수정처럼 맑은 물이 있지만 손 한 번 담그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붉은 단풍잎이 돌길 위에 내려앉아 꽃길이다. 삶에 조바심일랑 내려놓으란다. 계절이 지난 자리가 남긴 그리움이 발밑에서 바스락거린다. 하늘이 한없이 높은 가을날 부부는 벗 삼아 길을 걸었다. 설악산의 가을은 단풍이 있어 더욱 풍요롭다. 그러나 대청봉의 가을은 쓸쓸하다. 그 거대한 산을 올랐다는 것만으로 칭찬받고 싶다. 고비 경험이다.

친구들이 대단하단다. 정상에서 기분 좋았느냐고 묻는데 좋았다는 말을 못했다. 다 올라왔구나 하는 안도감 그런 거였다. 내려와서도 흐느적거리는 다리를 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감동은 집에 와서 이틀쯤 지나 생각해보니 내가 해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걸을 때마다 느끼는 종아리의 통증이 불편하다. 이렇게 뼈아프게 걸어 본 경험을 했는가. 꿈은 꾸는 것이 아니다. 생각만 하고 있으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큰 산은 그냥 큰 산이 아니다. 긴장되고, 지치고, 힘들었지만 도전했다는 생각만으로도 기쁘다. 치열함 뒤에 느껴보는 달콤한 여유, 성취했다는 귀한 경험, 세상에 대한 자신감이 생긴다. 가을의 끝은 아쉬운 듯 바람이 분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