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너지 못한 길
건너지 못한 길
  • 김희숙<수필가·원봉초병설유치원교사>
  • 승인 2016.11.03 20: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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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김희숙

은행잎이 사르락 사르락 허공의 창을 닦으며 떨어지고 있었다. 마치 세상을 청소하기라도 하듯. 찬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하는 아침, 은행잎의 하강식을 보며 출근길에 올랐다. 은행잎이 싸락눈처럼 쌓인 횡단보도에 섰다. 옆에 서 있는 가을날처럼 스산한 부녀가 설핏설핏 내 시선을 베어 갔다.

소녀는 웃는 듯 우는 듯 일그러진 얼굴로 세상의 모든 표정을 얼굴에 담고 있었다. 손가락으로는 뒹구는 은행잎을 가리키고 있었다. 남자는 딸의 얼굴에 자신의 표정을 모두 위임한 듯 텅 빈 논바닥 같은 얼굴로 우듬지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장애를 가진 딸을 부축하여 어디론가 가는 듯했다.

신호등이 바뀌고 횡단보도를 건넜다. 도로를 건너면서도 그들 부녀에게 신경이 자꾸 쏠렸다. 소녀는 나팔꽃 줄기처럼 팔을 배배 꼰 채 한발 한발 땅에 발을 디디고 있었다. 온몸을 갈대처럼 흔들면서 하얀 선이 그려진 횡단보도를 마치 사다리라도 오르는 듯 위태롭게 건너고 있었다. 그 옆에 바지랑대처럼 붙어 펄럭이는 소녀를 부축하는 마늘종처럼 깡마른 남자는 여전히 표정을 숨기고 있었다. 나는 선 듯 도와주지 못하고 쭈뼛거리며 길을 걸었다. 울컥이며 걷는 소녀의 걸음걸이에 마음이 쓰였다. 횡단보도를 건너고 나서도 걸음을 옮기지 못하고 그들을 쳐다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들은 횡단보도를 건너지 못한 채 신호를 놓쳐버리고 말았다. 신호등은 이미 빨간 불로 넘어가고 그들은 꼼짝도 못하고 도로 가운데에 있었다.

횡단보도의 중간에 그들이 갇혀 있었다. 마치 그물에 걸린 새처럼. 차들은 그들의 행방쯤은 알 바 아니라는 듯 도로를 질주하고 있었다. 어떤 차는 경적을 울리며 갇힌 그들을 한층 긴장시켰다. 갇힌 시간 속에서도 소녀는 손가락으로 나뭇잎을 가리키고 있었다. 남자는 흙빛이 된 얼굴로 소녀가 다칠세라 소녀의 한쪽 팔을 꼭 잡고 있었다.

신호등이 한 차례 더 색깔을 바꾸고 그들은 간신히 길을 건넜다. 잠시 후 그들 앞에 노란 스쿨버스가 멈췄다. 소녀를 태운 버스는 길게 누운 도로를 지우며 달려갔다. 남자는 버스의 뒤꽁무니를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그리고 은행잎을 찬찬히 보더니 한 잎 주워 한참을 바라보다 길을 건너 골목으로 사라졌다.

남자가 사라진 골목에 시선을 떼어주다 나도 은행잎을 주워 가만히 살펴본다. 남자는 은행잎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잎 위로 수없이 많은 잎맥이 길처럼 깊게 패어 있다. 찾을 수 없었던 길들이 작은 잎 속에 가득 펼쳐진다. 내가 건널 수 없었던 수없이 많았던 길들을 눈으로 건너본다. 생의 길 위에서 길을 찾지 못하고 헤매던 날들을 떠올려 본다. 얼마나 더 길을 건너야 길을 건널 수 있을까.

길 위에 바람이 분다. 은행잎이 펄럭이며 뒹군다. 길 잃은 아침이 주춤거리며 도로 위에서 나부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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