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목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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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은희<수필가>
  • 승인 2016.10.25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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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이은희

바닷길이 점점 드러난다. 커다란 몽돌은 만화 속 공룡 알이 잠든 양 잠잠하다. 몽돌은 파도와 한 몸처럼 쓸리는 남해 것과는 확연히 다르다. 주먹보다 작은 몽돌은 보았으나 이렇게 큰 몽돌은 처음이다. 두 손으로 들어올리기에도 부담스러울 정도의 크기다. 자잘한 돌끼리 부딪는 소리가 좋아 녹음하여 듣기를 얼마나 하였던가. 몽돌의 선입견을 지울 수가 없다.

바위가 작은 몽돌이 되기까지 몇 억겁 시간이 흘러야 하는가. 또한 부딪혀 부수고 깨지는 고통을 어찌 감내하였으랴. 크기가 다른 돌들이 무수하나, 돌들은 한 몸처럼 엉겨 있다. 바닷물이 빠지고 돌길이 보여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이곳 몽돌은 파도가 보채도 침묵하니 파도소리 또한 스스로 잦아든다. 몽돌의 생애가 내 안에 들어와 거친 파도의 부대낌과 신산함을 전이한다.

바닷길인 열목개는 성난 파도를 잠재우는 터인가 보다. 두서없이 웅얼거리며 달려드는 파도의 감정을 순식간에 요리한다. 아울러 나의 심신도 무념의 상태로 든다. 이곳으로 오기 전 내 모습이 떠오른다. 바쁘다는 핑계로 아무 정보 없이 지인의 꽁무니를 무작정 따라나선 것이다.

하지만 등대섬을 보고자 소매물도 망태봉을 넘는 발길을 쌍수 들어 저지하고 싶을 정도다. 숨 막힐 듯 쏟아지는 태양의 기운을 흉보며 부질없는 말을 공중에 부려놓는다. 바람도 내 말을 엿들었던가. 잘 빗은 머리칼을 사정없이 헝클어 놓고 내 몸을 탐내는 양 연신 들었다 놓았다 한 것이다. 제주의 바람은 비길 데가 아니다. 좋아하는 여행도 열악한 환경 앞에선 감정은 힘없이 무너진다.

몽돌 길은 시간이 흐를수록 길다운 길로 변신하고 있다. 파도에 휩쓸리지 않는 견고한 열목개가 어디에 또 있으랴. 소매물도와 등대섬을 잇는 바닷길은 하루에 두 번 길을 터준다. 밀물과 썰물이 달의 조화라고 하지만, 그저 신기할 뿐이다. 성미 급한 이들은 이미 신발과 양말을 벗고 앞으로 나아간다. 그도 그럴 것이 등대섬에 올라 풍경을 조망하고 물이 차기 전에 길을 건너야 한다. 섬 안에 갇히지 않으려면 어서 서둘러야 하리라.

등대를 향하여 오를수록 눈앞에 소매물도의 전신이 드러난다. 돌섬에 풀이 뿔처럼 희끗거리고 마치 공룡이 낮은 자세로 누운 듯한 형상이다.

열목개 몽돌은 역시 공룡이 낳은 알이라 해도 믿으리라. 몽돌은 살아있는 화석이다. 몽돌은 파도에 쉬이 휩쓸리지 않고, 거센 바람에도 끄떡하지 않는다. 몽돌은 알을 깨트리고 나올 그날을 기다리며 묵언정진 중인지도 모른다. 열목개는 세속의 묵은 때를 벗는 다리이다. 순간 거센 바람에 모자가 저만큼 날아가 상념에서 벗어난다. 신의 영역이니 생각을 멈추라는 신호인가.

등대에 오르니 생각했던 대로 절경이 펼쳐져 탄성이 절로 흐른다. 깎아지른 기암절벽과 주상절리, 푸른 바다엔 크고 작은 섬들. 바다는 이웃이 있어 생활이 무미건조하지 않아 좋으리라. 이제 불같이 일었던 상념과 온몸을 적신 땀은 온데간데없다. 몸속의 독소가 빠져나간 듯한 일탈이다. 두 눈을 감고 두 팔을 활짝 펴본다. 온몸에 속속들이 안기는 바람과 하나다. 순간 뇌리를 스치는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미명이 떠오른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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