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살 시인
네 살 시인
  • 이수안<수필가>
  • 승인 2016.10.23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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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가는대로 붓가는대로
▲ 이수안

온 가족이 해운대 해변을 찾았다. 저만치에서 바다가 보였을 때 우리는 탄성을 지르면서 바다를 향해 달렸다. 나는 네 살 서연이의 손을 잡고 서연이 어미·아비는 강아지 `나무'의 목줄을 잡고…. 우리는 파도를 향해 달려가고 파도는 우리를 향해 달려왔다.

파도에 발을 적실 듯 바닷물 가까이 가자 탄성은 한숨으로 바뀌었다. 망망대해를 바라보는데 한 서너 번 나오던 한숨이 잦아들더니 이내 침묵으로 바뀌었다. 인간의 상상으로는 그 양을 가늠할 수조차 없이 크나큰 물, 태초로부터 현재를 지나 영원히 존재할 바닷물, 그 앞에서 마치 언어를 잃어버린 사람처럼 말문이 막혀버린 것이다.

바닷물의 영원성에 비하면 나의 삶은 어쩌면 파도가 만들어내는 하나의 작은 물방울만큼이나 짧지 않을까. 운이 좋아 한 백 년을 산다 해도 바닷물 앞에서 나의 삶은 한갓 찰나라 해도 과언은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나는 찰나의 시간을 잘 쓰고 있는 걸까.

지난날의 어느 한때는 아픔, 분노, 체념 등이 나의 시간을 지배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그런 감정이 차츰 빠져나가고 염려, 위안, 기쁨 등의 느낌이 그 자리를 채우기 시작했다.

그것이 한 그릇에 담겨 버무려지면서 나는 행복이라는 귀한 감정을 자주 느끼고는 했다. 그것이 언제부터였을까.

내 찰나의 시간을 더듬느라 멍한 시선으로 잠자코 바다만 바라보는데 서연이가 말했다.

“할머니, 물이 오다가 자꾸 가버려.”

“정말 그러네, 왜 그럴까?”

“응, 엄마 물이 손을 잡고 당겨서 그래.”

“엄마 물이 왜 당기는데?”

“아기 물이 길을 잃어버릴까봐 그렇지.”

초롱초롱한 눈으로 또박또박 제 생각을 말하는 서연이, 이 어린 것이 어찌 이리도 기특한 생각을 할까. 나는 예순을 살아도 몰랐던 새로운 이야기를 네 살 서연이의 동심을 통해 배운다.

바닷물은 엄마 물, 파도는 아기 물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아기 물이 해변으로 밀려 나오다가 다시 밀려가는 까닭은 길을 잃을까 봐 염려하는 엄마 물의 사랑 때문이었다는 것을, 그래서 바닷물이 넘치지 않는다는 것을.

온갖 때로 얼룩진 나의 눈으로는 도저히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는 이야기가 아닌가.

서연이는 내가 상상도 못 한 이야기를 종알종알 수시로 조잘거리고는 했다. 그럴 때마다 지난날 내 시간의 주인인 양 나를 지배하던 아픔은 나에게서 조금씩 밀려났다. 그리고 내 안에는 긍정적인 감정이 견고하게 자리를 잡은 것이다. 나는 더 말을 잇지 못하고 조그맣고 나긋한 동체(童體)를 와락 껴안았다.

`그래, 바로 너였구나.'

네 살 시인에게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법을 배우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듣는 법을 배운 이 시간. 바닷물의 영원성 앞에 나의 시간이 찰나에 지나지 않는다 해도 지금 이 시각이 나는 좋다.

서연이는 나에게 또 가르쳐 줄 것이기 때문이다. 찰나의 시간을 영원처럼 쓰는 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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