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숨이
따숨이
  • 이수안<수필가>
  • 승인 2016.09.25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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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가는대로 붓가는대로

올해 큰아이는 엄청난 효도를 하고 있다. 내 딸로 살아온 34년간의 효도를 몽땅 합친 것보다 올해 한 효도가 더 크지 싶다.

서른 나이가 넘도록 결혼할 기미조차 없던 큰아이였다. 친구들이 하나 둘 결혼해도, 제 동생이 먼저 결혼해 질녀 서연이가 태어나도, 심지어 서연이가 온갖 재롱을 부려도 웃기만 할 뿐, 결혼에 대한 자극은 받지 않는 듯했다.

그러던 딸의 마음에 심상찮은 변화가 인 것은 작년 이맘때쯤이다. 사람이 생긴 것이다. 그 사람은 돌덩이처럼 딱딱한 딸의 마음을 말랑말랑하게 해 놓는 재주가 있었다. 이름 있는 날이라고 선물을 주고받고, 핸드폰을 손에서 놓지 않고, 맵시를 더 내고, 웃음이 많아지고…. 늦은 나이에 만났지만, 남들 하는 건 다 하는 눈치였다. ‘그래, 잘한다.’ 제발 부디 잘 안 벗겨지는 콩깍지가 눈에 확 씌어 속히 결혼하기를 바랐다.

그런데 당사자들은 달랐다. 처녀 나이 서른셋, 총각 나이 서른여덟. 늦은 나이에 만났으면 빛의 속도로 진행해 해가 바뀌기 전에 식을 올릴 줄 알았다. 그러나 둘은 인륜지대사를 앞둔 당사자답게 신중하고, 나이가 준 관록에 걸맞게 느긋했다.

그렇게 해가 바뀌고 꽃피는 사월이 왔다. 천지사방 꽃 피고 초록도 함께 피어나느라 온 대지가 들썩였다. 봄은 노처녀·노총각 마음도 이팔청춘의 가슴처럼 들뜨게 하였다. 그대들도 어서 짝을 지어 한 가정을 출발시키라고 봄이 재촉했는지도 모른다. 둘은 결혼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렇게 둘은 사월의 신랑·신부가 되었다. 기특하게도 신혼여행을 가더니 엄청난 선물까지 준비해 왔다. 나이 찬 자식이 결혼해 준 것도 고마운데, 떡하니 아기까지 만들어 온 것이다. 세상에나! 조그만 것이 힘도 장사지. 아기는 양가 어른들에게 제 어미·아비를 단숨에 효성 지극한 자식으로 격상시켜 주었다.

고 기특한 아기에게 제 아비가 간절한 소망 담아 지어준 태명이 따숨이다. 살아가는 내내 삶이 따숩기를, 따숨이와 인연 닿는 모든 사람도 따순 삶을 살기를. 제 어미·아비의 소망이 잘 이루어지기를 양가 가족 모두 한마음으로 염원할 뿐이다.

따숨이가 오고 난 뒤 네 살 서연이가 부쩍 의젓해졌다. 어린이집에 다니는 서연이는 요즈음 제 이모가 운영하는 카페로 하원한다. 따숨이를 보기 위해서다. 서연이가 볼록한 제 이모의 배에 손을 대고 인사한다.

“따숨아, 안녕? 언니 왔어.”

“언니도 안녕? 따숨이는 언니가 와서 참 좋아.”

두 손으로 배를 감싼 제 이모가 대답한다. 서연이가 씨익 웃는다. 제 어미도, 제 이모도 웃는다. 그 풍경을 바라보는 나도 웃는다. 고사리손으로 서연이가 제 이모 배를 문지르면서 다시 말한다.

“따숨아, 너 태어나면 언니가 많이 놀아 줄게.”

서연이가 “따숨아” 하고 소리 내어 부르자 따사로운 기운이 카페 가득 잔잔하게 퍼졌다. 창밖 설성공원의 풍경도 따숩다. 산책하는 사람들, 등나무 그늘에서 장난치며 싱그러운 웃음 터트리는 여학생들, 그리고 저만치 인조잔디에서 어린아이와 공놀이하는 엄마가 있는 공원 풍경은 그대로 한 폭의 따스한 그림이다.

저 따사로운 세상에서 따숨이와 서연이도 따스한 심성의 성인으로 잘 성장하기를, 그래서 내 손녀들의 일상도 따사로운 저 풍경의 일부가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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