짙은 여름에 빚은 풍경
짙은 여름에 빚은 풍경
  • 임현택<수필가>
  • 승인 2016.09.19 18:3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生의 한가운데
▲ 임현택

햇살과 바람 자연이 빚어낸 풍경이 눈이 부시다. 소리 없는 아우성을 치며 잎사귀에 쏟아지는 햇볕에 저마다 고개를 들고 해를 쫓느라 화초들의 목이 길어진다. 우리 집은 한나절이 되면 이렇게 식물들의 향연이 늦도록 연회 중이다. 중천에 밀고 들어온 햇볕은 안방을 반이나 삼키고도 모자란 듯 뜨겁게 집안을 후끈후끈 열기로 달궈 놓는다. 배란다 유리창에 자외선차단 버디칼도 있지만 대나무 발을 쳐 보았다. 안방 창문을 열면 온통 대나무 숲을 집안으로 옮겨 놓은 양 은은하게 흘러넘치는 향은 삼림욕처럼 평온하게 감싼다. 비 오는 날이면 베란다는 온통 대나무밭이다.

지난여름 끝자락, 막걸리가 유명한 포천의 왕방산으로 산행을 갔다. 여름등반의 가슴 벅찬 묘미란 장쾌한 능선 길을 뚝뚝 떨어지는 땀과 함께 산행하며 산기슭이나 골짜기에서 불어오는 곡풍을 맞는 짜릿한 기분이란다. 전날 비가 온 탓으로 상쾌할 거라 예상했건만 산속은 습도가 높아 후덥지근하고 자욱한 안개는 바람 따라 유람을 하고 있었다.

녹음방초로 물든 산야 새삼 신비로운 것도 없고 특별한 의미도 없는 여름산행, 계곡 피서도 아니고 도대체 산행 자체가 이해불가다. 왕복산행이 아닌 산을 넘어 하산하는 산행코스 한 발짝도 물러날 뜸이 없었다. 되돌아 갈 수도 없고 능선을 타고 암벽을 기어올라야 했다. 턱 선을 타고 흐르는 땀 줄기가 젖무덤에 고여 재촉을 한다. 발목에 추를 달아 놓은 양 점점 무거워지고 뒤처지기 시작한 난 맨 끄트머리에서 산행의 여유보다 따라가기가 바빴다.

안개가 뒤덮인 산속, 바람이 일 때마다 떠밀리는 안개는 굽이를 돌 때마다 산행인 들을 삼키려는 듯 뿌옇게 내려앉는다. 그 풍경은 어느 영화에도 사진에도 보지 못했던 진풍경에 넋이 나갔지만 감상보다는 따라가기에 마음이 바쁘다. 그때 어디선가 익숙한 냄새가 나의 오감을 자극한다. 우리 집 배란다의 향기 대나무 숲이었다.

선비정신의 표상 대나무, 예로부터 품격이 가장 높은 나무의 하나로 완전한 덕을 갖춘 군자〔全德君子〕의 상징이다. 또한 대는 인간정신과 가장 가깝다고 했다. 모든 식물은 잎이 생산한 양분으로 튼튼한 줄기로 성장하여 꽃을 피워 열매를 맺는다. 그러나 대는 다음 세대를 키우기 위해 모든 양분을 모두 땅속으로 보낸다. 해가 갈수록 대 줄기는 누렇게 노화되면서 말라죽고, 그간 비축을 한 양분은 죽을힘을 다해 죽순 하나를 세상 밖으로 밀어올린다. 후세를 위해 자신을 헌신한 대나무 우리 부모와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백 년 만에 꽃피는 인내력 강한 식물로 꽃이 피고 나면 말라죽는 대나무, 대를 두고 ‘세기(世紀)의 식물’이라 부른다.

중국 전설에 의하면 상상의 새 봉황은 배가 고파도 아무것이나 먹지 않고 귀한 대나무 열매만 먹는다 했다. 대나무는 풀도 나무도 아니다. 어진 사람이다. 라고 표현 한 학자도 있다. 뚜렷한 마디와 곧게 뻗은 줄기, 속은 비어 있지만 막힌 마디는 강직함을 유지한다. 강건하고 대쪽 같은 사람이란 불의와 일체 타협지 않고 지조 있는 사람으로 대는 군자로 비유한다 하니 대나무 숲의 풍광이 예사롭지가 않다.

내 비록 끄트머리에서 따라가기 바쁜 산행이었지만 짙은 여름날이 빚은 이 풍경 그리고 대나무가 주는 또 다른 의미에 흠뻑 매료된 하루였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