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화배 시인의 문학 칼럼
박화배 시인의 문학 칼럼
  • 충청타임즈
  • 승인 2006.12.22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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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길도 가는 길 '고산을 생각하는 예송리 마지막 밤'
산을 내려오면서 이곳을 찾기 이 전까지는 고산이 초막이나 짓고 맑은 이슬처럼 청렴한 은둔생활을 하였으리라는 생각을 했던 것이 참으로 어부사시사의 세계만을 알고 있었던 듯하여 내가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던 윤 고산의 이미지는 그의 유적지를 돌아볼 때마다 여지없이 깨어져 내동댕이쳐지고, 세연정(洗然亭) 정원에서는 행동적(行動的)으로 즐기고, 석실(石室)에서는 시각적(視覺的)으로 즐기고, 곡수당(曲水堂)에서는 청각적(聽覺的)으로 즐겼을 그 분을 생각하니 공연히 내 마음속에서 시샘이 솟아오르는 듯 하였다.

그러면 이렇게 호화로운 보길도 왕국을 고산은 어떻게 건설하고 유지할 수 있었을까

그는 원래 부자이기도 하였지만, 그 당시 당파싸움으로 인하여 나라가 어지러웠고 관리들은 백성을 대상으로 재산을 모으기에 여념이 없었기 때문에 백성들은 가난에 시달리며 근근이 살아갔다고 한다. 이에 윤 고산은 진도의 굴포리와 노화도(옛날에는 노아(奴兒)라고 불렀는데, 이는 노예들이 사는 섬이라는 뜻이라 하여 지금의 갈대꽃이 피는 섬이라는 노화(盧花)로 바꿈)에 간척사업을 해서 거기에서 생산되는 쌀을 고산 유적지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주어 춘궁기에 정부에서 행하는 환곡의 피해를 입지 않게 함으로써 부용동의 왕국()을 건설할 수가 있었다고 하며, 또한 효종의 사부였기 때문에 다른 일파들로부터 역적모의를 하고 있다는 따위의 누명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아쉬운 발걸음을 옮기며 몇 번이고 되돌아 봤던 부용동(芙蓉洞).

굽어진 길을 걸어서 물 좋고 돌 좋다는 예송리(禮松里)로 향했다. 석실(石室)과 곡수당(曲水堂)을 가느라고 아침식사를 제대로 못한 탓인지 뱃속에서는 연방 쪼로로, 꼬로록 소리가 야단이었다. 걷기는 걷되 이 보채는 소리가 끝날 것 같지 않아서 길옆 바위 위에 앉아 버너를 지피고 라면을 끓였다. 바닷바람은 이제 막 피어나는 갈대를 너울 피며 지나가고 가파른 벼랑아래의 바다에는 작은 고깃배가 그물질에 여념이 없었다. 다시 취사도구를 챙겨 넣고 벼랑길을 따라 걸었다.

예송리(禮松里).

바닷가에 늘어선 팽나무, 생달나무, 동백나무 등 90여종의 나무로 이루어진 숲 아래에 묵석(墨石)의 둥글둥글한 돌들이 마치 백사장처럼 펼쳐져 있어 탄성소리가 절로 나오고 건너편 작은 예작도(禮作島)에는 후박나무가 가득 들어차 말로써는 형용할 수 없는 풍경인지라 멍청하게 바닷가에 앉아 있었을 뿐이었다.

밤이 되니 금방이라도 와르르 무너져 내릴 것 같은 무수한 별들이 너무나 선명해 가슴이 멍해지도록 하게하고 바라다 볼 수록 가슴이 벅차옴을 어쩌랴.

살며시 왔다가 흘러내리는 파도는 작은 아가들의 속삭이는 소리 같이 사르르르….

나같이 무딘 이의 마음도 이처럼 벅차오는데 고산(孤山)과 같은 분이야 오죽했으랴. 어쩌면 그도 이곳에 앉아 오우가(五友歌)를 읊었을지도 모르지.

'내벗이 몇이나 하니 수석(水石)과 송죽(松竹)이라.

동산에 달 오르니 그 더욱 반갑고야

두어라 이 다섯밖에 또 더하여 무엇하리.

구름 빛이 좋다하나 검기를 자주한다.

바람소리 맑다하나 그칠 때가 하도 많다.

좋고도 그칠 때 없기는 물뿐인가 하노라.

꽃은 무슨 일로 피면서 쉬이 지고

풀은 어찌하여 푸르는 듯 누르나니

아마도 변치않는 것은 바위뿐인가 하노라.'

… 중략 ….

내일 아침이면 이 피안의 세계를 떠나야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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