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교육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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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청타임즈
  • 승인 2006.12.22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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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교실에서
박 을 석 <전교조 충북지부 정책실장>

청소를 마치고 아이들이 돌아갔다. 왁자지껄도, 부산함도, 애만 쓰는 가르침도 아이들과 함께 돌아갔다. 교실은 텅 비었다. 잠시 교탁 의자에 앉아 마음을 추스린다. 휴~, 길게 휘파람 불 듯 숨을 내쉰다.

그도 잠시. 옹기종기 모둠을 이룬 조그만 책상과 의자들이 눈에 들어온다. 빈 자리에 아이들을 앉혀본다. 녀석들 같으니라구……. 유리창 너머 겨울햇살이 교실 깊숙이 들어와 밝게 물들인다.

앉아 있는 교탁에서 고개를 들면 작품란이다. 개그콘서트, 이야기대회, 노래자랑 등을 알리는 안내장이 가득하다. 안내장에는 동그란 얼굴들이 입을 한껏 벌리고 웃는다. 방금 집으로 돌려보낸 아이들, 아이들, 얼굴들이다…….

아니 이러고 있을 새가 없다. 세밑이고 학년말이다. 교과별 수행평가기록부, 재량활동 및 행동발달사항 기록부는 제출했나? 교육과정 수립을 위한 설문지 통계는 어떡하나? 내년도 교육계획서는 어떻게 했지? 예산요구서는 행정실로 보냈던가? 분반자료도 준비해야지. 다쳐서 학교 못 온 녀석, 내년 교과서도 챙겨 놔야지. 생활본 수정보완사항 조사도 해야 하는구나. 보고공문은 빠트리지 않았는지. 참, 연말정산서도 해야 하고, 자율연수비 청구도 해야지. 오늘 모임은 뭐가 있었지? 내일은 뭐가 있었더라……. 휴~.

마르틴 부버라는 이의 [나와 너]라는 책을 뒤적거린 적이 있었다. 하도 오래 전이라 내용도 거의 다 잊어 먹었다. 그러나 책 첫머리 몇 구절은 이상하게도 기억에 남아 있다.:

“태초에 관계가 있었다.”

“<나-너>는 짝말이다. <나-그것>도 짝말이다.”

“<나-너>는 짝말이면서 존재의 근원을 밝히는 근원어이다.”

관계로서 존재를 바라보라는 메시지를 들었던 것 같다. 단독으로선 무의미한 말, 짝으로 있을 때만 의미가 있는 말, 비로소 존재할 수 있는 말이 짝말이었던 것 같다. <나-너>는 충만하고 직접적이며 인격적인 친교의 관계를 말했던 것 같다. 이에 비해 <나-그것>은 사물에 대한 관계이며 사고와 행동의 도구로 여기는 관계이며 우열적 상하관계를 말했던 것 같다. 책을 읽다가 김춘수 시인의 <꽃>이라는 작품도 떠올렸던 것도 같다.

겨울이고 세밑이다. 갈무리하기에 분주할 때이다. 눈으로 보면서도 눈이 얼굴 앞에 붙었는지 잊어버릴 만큼 바쁠 때이다. 그러나 춘생하육(春生夏育) 추수동장(秋收冬藏)- 봄에 낳고 여름에 기르고 가을에 거두며 겨울에 간직한다는 한해살이의 흐름을 돌이켜 보아야 할 때다.

생각하건대, 아이들과 나는 얼마나 <나-너>의 짝말로 새로 태어났는지 아쉬움이 많다. <너>를 만나 비로소 새로운 <나>로 서고, <나>로 인하여 더 충실한 <너>로 채워지도록, 나는 얼마나 아이들을 만나고 아이들 속으로 걸어 들어간 것일까?

아이들을 돌려보내고 빈 교실에서, 홀로 아이들을 돌려보내지 못하고 빈 의자에 한 명 한 명 앉혀 보는 만큼 아이들은 내 마음 속으로 들어와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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