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에 자비를
교과서에 자비를
  • 권혁두 기자
  • 승인 2016.08.28 2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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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 권혁두 국장

범인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다반사로 벌어지는 판이기는 하다. 그렇더라도 내년부터 초등학교 1~2학년 어린이들이 배우게 될 수학교과서가 지금보다 더 어려워질 것이라는 얘기는 ‘왜?’라는 의문부호에 ‘미친거 아냐’라는 푸념까지 덧달게 만든다.

교육부는 지난해 개정된 교육과정에 따라 초등 1~2학년용 새 수학교과서를 만들고 있다. 한 시민단체가 최근 시안을 입수해 살펴봤더니 페이지가 현 교과서보다 30% 이상 줄어들었다고 한다. 반면 책에 담긴 교육과정 자체는 6.5% 정도만 줄었다는 것이다. 내용은 별반 차이가 없는데 가르치는 과정을 지금보다 크게 줄였으니 학생들이 진도를 따라가기가 더 힘들어질 것이 뻔하다. 1학년 교과서의 경우 1~9까지 수 개념을 가르치는 과정이 4쪽에 불과하다. 1~5까지 개념을 익히는 과정에만 일본은 12쪽을, 핀란드는 16쪽을 할애하고 있다. ‘연결큐브’, ‘우즐카드’, ‘퀴즈네어 막대’, ‘수배열표’ 등 초등 저학년생들이 감당하기 힘든 어려운 용어나 개념도 적지않게 등장한다.

그렇잖아도 초등학교 수학이 너무 어렵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돼온 판이다. 6학년의 40% 가까이가 수학을 포기한 ‘수포자’라는 통계도 나와있다. 아직 완성본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이대로 새 교과서가 만들어져 보급된다면 아이들의 학업 부담이 커지고 수포자는 더 늘어날 공산이 높다. 선행학습과 사교육비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한국은 세계가 인정하는 ‘수학강국’이다. 수리력을 늘리기 위해 어린 아이들을 고통으로 내몰 까닭도, 필요도 없는 나라다. 각국의 수학영재들이 실력을 겨루는 국제수학올림피아드에서 우리 고등학생들은 매번 정상을 다툰다. 지난 2012년 아르헨티나에서 열린 대회에서는 참가학생 6명이 모두 금메달을 따는 진기록과 함께 종합 1위를 차지했다.

교육당국이 주목하고 고민해야 할 대목은 굴지의 수학영재 배출국이 노벨수학상으로 불리는 ‘필즈상’ 수상자는 한 명도 내지 못하는 딱한 현실이다. 지금까지 56명의 수학자들이 4년에 한 번씩 시상하는 필즈상을 받았지만 우리는 유력한 후보조차 내지 못하고 있다. 이유야 여럿 있겠지만 우선 수학영재들이 순수학문을 포기하고 법대나 의대 등 세속적 출세가 보장되는 분야로 방향을 틀기 때문이다. 수학올림피아드에서 따낸 금메달이 엉뚱하게 일류대 법과나 의예과를 가기 위한 스팩쌓기에 그치는 것이다. 공교육이 창의력 배양은 뒷전이고 문제풀이 기교만 가르치기 때문이라는 지적도 있다. 학생들이 문제를 풀어 정해진 답을 찾는 올림피아드에서는 독보적 능력을 발휘하지만 새로운 이론을 발견하거나 규명해야 하는 연구의 차원에 가서는 고전을 면치 못한다는 것이다. 학부모 교육열과 학생 학업능력에서 세계 최고 평가를 받으면서도 노벨상과는 담을 쌓고 있는 현실과 다르지 않다.

다른 과목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대입 수능시험 영어문제는 옥스퍼드와 하버드 졸업생들도 풀지 못할 정도로 어렵다. 그들은 한결같이 “한국 고등학생들은 모두 영문학자 지망생들이냐”고 반문한다. 그렇지않고서야 실생활에 필요도 없는 고차원의 문법에 이토록 매진할 리가 없다는 것이다. 국어시험에서는 지문으로 제시된 시나 소설의 원작자도 오답을 내는 문제들이 출제된다. 작가는 시험지가 자신의 작품을 해석하는 방식과 결론에 전혀 동의하지 않지만 교육부는 저만의 정답을 우겨댄다.

선행학습 없이는 감당못할 교과서를 강요해서 기어이 성적순으로 아이들을 줄 세우고 포기와 좌절부터 가르치는 가혹한 교육을 언제까지 끌고 갈 것인가. 시험석차만이 유일한 잣대로 작용하는 우리 교육이 배출한 ‘인재’들이 지금 어떤 민낯들을 드러내고 있는지 곱씹어 볼 시점이다. 각국 어린이들의 행복지수 조사에서 우리 아이들은 늘 바닥권이다. 부모에 내몰려 이 악물고 학원을 순례하며 출세길을 닦거나, 일찌감치 둘러리 인생을 배우는 어린이들 모두 행복할 리 없다. 아이들 질식시키는 교과서를 만들어 행복감을 박탈할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의 답을 정해놓고 다른 답을 찾는 탐구행위는 일절 허용치 않는 경직된 교육부터 반성하는 것이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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