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목련
백목련
  • 충청타임즈
  • 승인 2006.12.20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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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채화를 위하여
오 향 순 <수필가>

구름이 낮게 내려앉은 스산한 오후 마음 가는 대로 걸어본다. 나의 일상이 그다지 버거워서도 무료해서도 아닌데 날씨의 정취 때문일까. 이런 날은 소란스럽지 않고 아는 사람을 만날 일이 별로 없는 길을 혼자 오롯이 걷고 싶어진다. 한적한 길을 찾아 걷다가 호숫가에 덩그마니 자리한 벤치에 앉아 살아온 시간의 편린들을 붙들어 본다.

철쭉이 흐드러지게 핀 오월이었지.

축복의 박수 속에 내 디뎌진 새로운 출발. "너희 부부는 물빛 수채화처럼 살아 갈 거야." 어릴 때부터 늘 함께 해온 친구의 축하 말을 가슴에 담고 살아왔다. 어떤 수채화가 그려지고 있는 중인지 조심스레 한번씩 펼쳐보면서, 누구에게 내 보이며 자랑할 만한 작품은 못되지만 얼마나 소중한가. 삶의 환희와 고독과 아픔이 어우러진 나만의 작품이니 말이다. 어떤 구도로 무엇을 그려나가겠다는 거창한 계획은 처음부터 없었다. 다만 내게 주어진 하루 하루를 맘껏 사랑하리라는 소망을 새벽마다 다지곤 했다. 때때로 회한(悔恨)에 몸서리치기도 하고 낙심하여 수렁 속으로 침잠하기도 했지만, 그 모든 것은 나를 바로 세워나가기 위한 필연의 섭리였으리라.

이따금씩 뒤돌아보며 나를 확인해 보는 낮아짐과 하늘을 우러르기에 부끄러움이 조금씩이나마 덜해지기를 바라는 용기를 버리지 않고 있음에 어설프지만 나의 수채화에는 꿈이 묻어날 것이다.

아, 이제는 나의 울타리와 분신들이 나를 찾을 시간이구나. 그 기다림이 싫지 않다. 미련 없이 혼자만의 시간을 훌훌 털고 일어선다. 저녁 식탁을 맛스럽게 할 뭐가 없을까. 식품가게에 들러 둘러보지만, 익숙한 푸성귀 몇 가지만 사들고 나선다. 그렇다고 같은 재료를 색다르게 요리해 내는 솜씨가 있는 것도 아닌데 아무거나 잘 먹어주는 나의 식솔들이 고마울 따름이다. 검은 봉지 두어 개를 양손에 들고 걷다가 문뜩 걸음을 멈춘다. 꽃가게 유리창 너머의 신비한 생명들이 바깥 풍경을 주시하고 있다. '아직은 꽃이 비쌀 텐데' 지극히 현실을 살아가는 주부이기에 잠시 동안의 망설임을 배제할 수는 없지만, 꽃을 주고받는 가슴의 설렘과 꽃을 꽂아보는 마음의 잔잔한 기쁨을 알기에 나는 가끔씩이나마 무리()를 하며 살아가고 싶다.

흐린 날씨에 잠기어버린 진한 노을이 내 품속 한 단의 소국(小菊)속에 넘실댄다.

"웬 꽃이야" 무심히 한 마디 던지지만 내심 반가워하는 남편, "야! 꽃 정말 예쁘다." 좋아해 주는 아이들, 내 수채화의 한 귀퉁이가 웃음 짓는다.

시끌벅적하던 아이들이 곤한 잠에 빠져들면 다시 누릴 수 있는 나만의 시간. 꽃병 앞에 앉아 은은한 향과 소박한 아름다움을 만끽하다가 김용석 님의 '꽃'이라는 동시를 외워보며 꽃 마음을 생각한다.

'나는 꽃 이예요. 잎은 나비에게 주고 꿀은 솔방 벌에게 주고 향기는 바람에게 보냈어요.

그래도 난 잃은 건 하나도 없어요. 더 많은 열매로 태어날 거예요 가을이 오면'

나는 오늘 누구에게 무엇을 주었던가. 너무 많이 받아버리기만 했구나 오늘도.

꽃 마음을 감히 흉내 낼 수 없지만 날마다 날마다 닮아가리라 나의 맑은 물 빛 수채화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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