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내파마
배내파마
  • 전현주<수필가>
  • 승인 2016.08.02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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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나는 파마를 하고 태어났다. 아무도 미리 내게 어떤 모습을 원하는지 물어보지 않았다. 앤 셜리가 홍당무라고 놀리는 길버트의 머리를 석판으로 내려치며 빨간 머리로 고민할 때, 나는 고약한 곱슬머리와 씨름하고 있었다.

여름이 싫었다. 덥고 습한 여름이 되면 머리는 더욱 제멋대로 굴었다. 어쩌다 밥솥의 뜨거운 김이라도 쐬는 날이면 앞머리는 사방으로 덩굴손을 뻗어대는 식물이 되었다. 더군다나 가랑비를 맞으면 머리 전체가 감전된 듯 빠글거렸다.

친구의 긴 생머리는 가벼운 걸음에도 찰랑거렸다. 친구는 하루에도 몇 번씩 귀찮아 죽겠다는 표정으로 고무줄을 입에 물고 머리를 손가락으로 대충 빗어 넘겨 아무렇게나 동여매곤 하였다. 그럴 때마다 친구의 하얀 이마를 간지럽히며 흘러내리던 곧은 머리카락이 부러웠다.

두발검사가 있는 날이면 매번 선생님께 구구절절 설명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어느 선생님은 파마 의심자인 내 머리에 기어이 분무기로 물을 뿌려 확인해 보신 적도 있었다. 머리 한 움큼을 실컷 적셔 놓고 뻘쭘해 하시던 선생님의 표정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이 이런 나를 부러워하기 시작했다. 모르는 사람이 다가와 넌지시 파마의 이름을 묻거나, 어디에서 한 파마냐며 말을 건네는 일이 잦아졌다. 웃으며 배내파마라고 말해도, 그냥 곱슬머리라고 대답해도 미심쩍어하는 눈치였다.

어느 날 아름다운 생머리 친구는 앞머리에 핑클파마를 하고 나타났다. 맙소사, 그 머리는 내가 밥솥의 수증기를 제대로 얻어 쏘이고 덩굴손으로 변신했을 때의 바로 그 모양새였다. 도대체 왜 친구가 돈까지 내가며 그 지경이 되어 왔는지 그때는 이해할 수 없었다.

세 아이를 낳아 놓고 보니 모두 곱슬머리다. 다행히도 미안해하는 엄마의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아이들은 펴고 싶으면 펴고 그대로 있고 싶으면 그대로 있다. 이것도 저것도 나름대로 다 좋단다. 그렇다면 어린 시절의 나는 고작 그 둘 중 하나를 고를 수 없었다고 화를 냈다는 말인가. 곱슬머리를 빌미잡아 서서히 정체를 드러내는 내 초라한 운명을 향해 소심한 불평을 늘어놓은 것은 아니었을까.

지금까지 몇 번의 부질없는 시도가 있었다. 큰 기대를 걸고 과감한 머리 모양에 도전해 본 것이다. 하지만 그때마다 참패였다. 놀랍게도 내 곱슬머리는 적은 머리숱을 두 배로 많아 보이게 하고, 큰 얼굴을 작아 보이게 하는 고난도 특수효과를 담당하고 있었다. 나는 그제야 누군가 신중히 배려하고 심사숙고해 준 듯 느껴지는 내 숙명을 순순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좀이 쑤셔 몇 시간씩 미용실에 앉아 있지 못하는 성미까지 고려해 준 것을 생각하면 당장 감사표시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이제 머리와의 실랑이를 끝내려고 한다. 배내파마를 한지 수십 년이 되다 보니 이제는 살살 다루는 요령이 생겼고, 사람들에게 종종 듣곤 하는 얼마나 좋을까 라는 말도 싫지만은 않은 까닭이다. 파마와 염색을 하지 않아 내가 벌어들인 돈과 시간은 다 어디에 모여 있을까? 나는 지금부터 그것들을 인출하여 멋있게 쓸 궁리를 해 볼 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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