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밭
풀밭
  • 김용례 <수필가>
  • 승인 2016.07.21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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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김용례

소나기가 한바탕 시원하게 퍼붓고 간다. 목말랐던 식물들 물 넘기는 소리가 들리는 듯 논과 밭이 만족하게 푸르다. 그런데 남편은 한숨을 쉰다. 이 비가 그치고 나면 밭에 풀이 쑥 올라올 거라며 겁이 난단다. 풀만 없으면 농사지을 만하겠단다. 봄에 뽑아 줬어야 하는데 시기를 놓쳤다.

우리 밭은 경사가 졌다. 그래서 오늘같이 소나기가 지나가면 흙이 다 떠내려간다. 올해는 흙이 파이지 않았다. 풀들이 흙을 꽉 움켜쥐고 있었던 것이다.

밭에 오면 심란한 건 사실이다. 집에서는 풀하고 같이 키우지 하다가도 밭에 오면 저 풀들을 어쩌나 싶다. 풀밭인지 농사를 짓는 밭인지 분간하기가 어렵다. 쉽게 하려면 제초제를 뿌리면 된다. 그러나 이 소중한 것들에게 농약을 친다는 것은 용납될 일이 아니다.

주말에는 서울에 있는 딸이 내려온다. 엄마 밥이 먹고 싶다는 말에 난 주말 내내 주방에서 서성거린다. 때로는 귀찮기도 하고 힘도 들지만 그마저도 없다면 편안하기는 하겠지만 사는 맛이 없지 싶다. 절간 같던 집이 주말에는 사람 사는 집 같다. 사람 사는 일이나 농사나 걸림돌이 삶을 지탱하는 이유가 되는 것이다. 풀밭 속에서 보라색 도라지꽃이 피고 있다. 보라색 꽃이 얼마나 예쁜지 위안이 된다. 그래 너희에게 농약 냄새를 뿌리면 안 되지 하고 말을 걸어보기도 한다. 업으로 하는 농사도 아니고 그곳에서 즐기는 시간과 건강한 먹을거리가 우리에게 주는 즐거움을 생각하면 풀을 뽑는 수고와 마음고생은 당연하다. 이만하면 만족이다 생각하게 된다.

처음 농사를 시작했을 때 이장님께서 풀을 이겨야 시골에 살 수 있다고 하셨던 말씀이 요즈음 새록새록 생각이 난다. 풀을 이길 생각은 없다. 그냥 있으면 있는 대로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살자 싶다. 농사를 시작했을 때는 지악스럽게 풀을 뽑아 댔다. 자고 일어나면 손가락이 구부려 지지 않았었다. 시장에 내다 팔 것도 아니고 나먹고 여유 있어 지인들과 나누어 먹는 것에 욕심을 부렸다. 풀 때문에 안달할 것도 없다. 나이 들면서 호들갑스럽게 좋은 것도, 땅 꺼지게 슬플 것도, 안달하며 살 일도 없다.

며칠 전 부부동반 모임이 영동에서 있었다. 영국사 만세루에서 시화전을 하고 있었다. 우리 모두의 시선을 잡았던 강석호님의 시 인생 // 가더이다 초록빛이 뒤도 보지 않고 //오더이다 된서리가 초대장도 없이 //빈 손 쥐고 가시더이다 인사도 없이//

오더이다. 오더이다. 가시더이다. 하면 한 생애를 마치는 것이다. 산다는 것이 별거 아니라는 것을 지금은 안다. 거기에 더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저 자연의 순리대로 흘러가는 것이 인생인 것을.

풀밭이 된 밭을 바라보며 울상인 남편에게 나는 풀밭에서 피는 보라색 도라지꽃이 더 영광스러워 보이지 않느냐며 위로했다. 풀을 뽑는 수고로움이 없었으니 마음 불편한 것은 참아 보자고 했다. “우린 지금 초원에서 놀고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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