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와 독서의 행간
비와 독서의 행간
  • 박명애<수필가>
  • 승인 2016.07.05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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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박명애

빗방울들의 난타다. 말달리듯 솨아~지면을 두드리다 디미누엔도. 그리곤 투둑~뚝! 똑.똑.똑. 따닥. 통! 스타카토. 그러다 다시 크레센도. 창안에서 듣는 빗소리는 참 좋다. 그런데 창밖은 긴장되고 어둡다.

크고 작은 비 피해들이 늘어나고 있다. 해남 어느 마을에서는 폭우로 주택 경사 뒤 흙이 무너져 일가족이 대피했다는 소식이다. 지난주 다녀온 곳이라 그런지 유독 마음이 쓰인다. 공교롭게도 다시 읽기 시작한 목민심서는 애민6조 <救災>를 지나는 중이다.

凡有災厄 其救焚拯溺 宜如自焚自溺 不可緩也

- 무릇 재해와 액운이 있으면 불탄 것을 구하고 빠진 것을 건지기를 내 것이 불타고 빠진 것처럼 조금도 늦추지 말아야 한다.

큰물이 나 산이 무너져 매몰된 곳이 30리나 되고 사람이 죽고 농사를 망친 곳이 이루 헤아릴 수가 없는 곳을 시찰한 목민관이 백성과 손을 맞잡고 통곡한다.

그리곤 백성이 원하는 바를 조정에 보고하기를 끊임없이 요구하나 감사는 오히려 인자하나 일에 어둡다고 상소를 올려 그를 이직시킨다.

그가 벼슬을 버리고 돌아가는 길 백성이 어린애가 어미를 잃듯 울었다 하니 백성을 다스리는 것은 어진 마음이지 행정능력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 다산은 적고 있다. 목민의 근본을 어디에 두고 있는지 그의 품성을 엿볼 수 있다.

목민할 마음은 있으나 몸소 실행할 수 없기 때문에 심서라 하였던가. 한때 정조의 총애를 받아 수원성을 설계하고 거중기 등 신 기재를 이용하여 수원화성을 쌓았던 그는 여전제를 통해 공동체에 의한 토지 공동 소유와 공동경작을 주장할 만큼 혁신적인 정치가였다.

하지만 정조가 죽고 난 뒤 황사영의 백서사건에 연루되어 18년이란 긴 유배 세월을 보내게 되는데 다산초당은 그가 11년간 머물며 다양한 저술 활동을 했던 유배지다.

지난주 책벗들과 해남 강진 만덕산 기슭에 자리한 다산 초당에 다녀왔다. 사실 그동안 책이나 영상자료를 통해서만 보았지 초행이라 무척 가슴이 설렜다. 입구에 차를 세우고 초당으로 오르는 길엔 마치 숲의 등뼈인 듯 굵은 나무뿌리들이 드러나 발끝이 조심스러웠다.

소리가 되지 못하고 옷섶으로 스며드는 안개비엔 알싸한 숲의 향기가 묻어왔다. 신비로움과 기대감으로 마주한 다산초당은 팔작 기와지붕 목조건물로 깔끔했다. 1958년 다산 유적보존회가 다시 지었다고 하는데 아쉽게도 마루에 앉아 떠오르는 건 귀양살이의 고단함과 학자의 고뇌로 가득했을 그의 삶이 아니라 유유자적 양반가의 여유다.

좋은 재료로 지어진 매끈한 초당 덕분에 ‘솔방울 주워다가 숯 새로 갈고 매화꽃 걷어내어 샘물 떠다 부어’ 차를 끓이던 다조도 연못도 고졸한 멋을 잃었다. 초당 옆 언덕 암석에 다산이 직접 새긴 ‘정석(丁石)’이라는 글자만이 그의 올곧은 품성을 담고 있는 듯했다.

초당 근처 천일각이란 정자에 오르니 습한 바람 속 멀리 강진만이 내려다보였다. 다산이 흑산도로 귀양 간 둘째형을 그리며 심화를 달랬던 곳일 거란다. 고요한 포구를 보며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여행에서 이런 외연뿐만 아니라 그가 남긴 정신적 유산들을 느낄 수 있는 곳이 될 수는 없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내려오는 길 백련사에서 여성의 자궁을 닮아 생명의 원천이라 여겨 이곳 강진만을 좋아한다던 일 년 넘게 근처 토굴에서 숙고 중인 정치인을 만났다.

그가 다시 정치인으로 돌아온다면 정약용이 꿈꾸던 목민에 가깝기를 사의재라도 가슴에 품었기를 진심으로 빌었다.

목민심서는 이제 아전과 관속들을 통솔하는 이야기로 넘어가고 있다. 시간이 소리가 된 듯 비는 여전히 난타를 연주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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