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원에서 아침을
능원에서 아침을
  • 이은희<수필가>
  • 승인 2016.06.27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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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이은희

얼마나 꿈꾸던 일인가. 그대와 나는 약속이나 한 듯 빵과 커피를 들고 능원을 찾는다. 영화「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 인적 없는 뉴욕 5번가를 느리게 걷는 ‘오드리 헵번’처럼, 나도 오래된 돌담을 지나 푸른 능이 보이는 곳으로 거닐고 있다. 느리게 걷다가 능원에서 소소한 아침을 먹을 참이다.

영화 속 주인공처럼 신분상승을 꿈꾸는 건 아니다. 지천명이 다 되어가도록 일상에 파묻혀 능원을 제대로 느껴보지 못한 일벌레이다. 시간 없다는 것이 핑계로 들릴지 모르지만 경주를 가려면 마음먹고 나서야 한다. 경주를 말하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왕릉, 그 주변을 할 일 없이 배회하고 싶었다. 능 주변을 느리게 거닐다 일어나는 느낌을 온전히 내 것으로 가지고 싶어서다. 느낌이란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무상한 것임을 잘 안다. 그러나 심장이 뛰는 한 간직하고 기록하고 싶은 질긴 나의 소명이라 여기니 어찌하랴.

고분에 뿌리박은 나무가 보인다. 능에 뿔 난 듯 자란 나무가 신기하다 못해 이상야릇한 기분마저 들게 한다. 마치 능이 사라지기라도 할 양 나는 사진을 박는 일에 여념이 없다. 보다 못한 그대는 나를 현실로 불러들인다. 제발 요기는 하고 시작하란다. 의자에 앉았으나 시선은 역시 고분에 돋아난 나무에 가 있다. 능의 주인은 왕가의 것일 텐데, 능을 어떻게 관리하였기에 봉분 위에 나무가 자라는 것일까. 후인이 소홀히 관리한 탓인가. 선산을 가꾸던 아버지를 떠올리면 가당치도 않은 일이다. 봉분 위에 나무가 자라도록 그냥 두지는 않았으리라.

무덤에 관한 한 일반인은 어떠한가. 평범한 일상은 죽은 자를 떠올리거나 무덤이 가깝지가 않다. 무엇보다 슬픔 내지는 우울한 감성을 지닌다. 그러나 경주 곳곳에는 무덤들이 산재하다. 이곳 사람들의 삶터는 무덤 속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봉분 위에 나무도 그네들의 일상이라 여기고 그냥 두었던 건 아닐까. 능위에 솟아오른 나무가 낯설다. 파격의 묘다. 아니 능에 생명을 불어넣은 듯 자유로운 느낌마저 든다고 할까. 밋밋하고 봉긋한 능이 대체적이지 않던가. 무덤에 관한한 틀에 박힌 머릿속을 헤집어 뇌세포를 새롭게 불러 앉힌 기분이다. 엊저녁의 바라본 고요한 능의 느낌과는 많이 다르다.

신비스러운 풍경이 펼쳐지는 저물녘이다. 봉분 주변에 갓 피어난 띠꽃이 하얗게 피어 잔디가 싱그럽게 다가온다. 둥글게 푹 퍼진 능 곁을 돌고 있으니 어머니 품속에 든 양 절로 편안해진다. 잠투정으로 찜부럭을 부리던 아이도 능 곁을 지날 땐 잠잠하다. 무거운 머리와 먹먹해진 두 귀를 이곳 고요에 맡겨도 좋으리. 나 또한 아무도 모르게 능에 기대어 잠들고 싶다. 능원은 생명의 꿈틀거림과 죽은 듯 고요함이 함께한다. 결국, 생과 사는 하나라는 걸 인지시킨다. 내 삶도 누군가의 곁을 돌고 돌다 어느 날 홀연히 사라지리라. 아니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을 향하여 달려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구가 태양의 둘레를 돌듯, 달이 지구의 둘레를 돌고 도는 것처럼. 어느 날인가 적멸의 길로 들리라. 만남과 이별의 경계를 넘어선 곳, 능원에서 나의 아침은 시작된다.

숨죽은 듯 편안한 일상에선 파격의 묘를 느낄 수가 없다. 능원의 아침은 본연의 나를 깨우고 무딘 감성을 벼린다. 시간이 흐를수록 봉분에 뿌리박은 나무는 고목으로 자랄 것이다. 잠시 머뭇대는 나그네나 신기한 듯 나무를 보아줄 뿐, 사람들은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듯 아무런 의문을 갖지 않으리라. 내 안에 잠재된 질긴 소명이 드디어 작은 소원을 이룬다. 이 느낌을 길게 갖고 싶은데 그대와 나를 찾는 벨소리가 길게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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