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가리
오가리
  • 임현택<수필가>
  • 승인 2016.06.21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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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호박 따위의 살을 가늘고 길게 도려내 말린 것>

生의 한가운데
▲ 임현택

마음이 가난하면 행복은 절반으로 슬픔은 배가 된다. 서글픔을 지우려 해도 머릿속에 뱅뱅 도는 슬픔은 도무지 지워지지 않아 아침노을 속 끊어지지 않는 한숨이 아둔한 내 뒤를 따라온다.

발 골절로 인하여 두 달 가까이 병원 생활을 하고 퇴원을 했다. 걷는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하며 걷는다는 것은 또 얼마나 축복인지 실감하면서 어두운 터널을 빠져나온 기분이었다.

럭셔리하고 스타일리시 한 공간도 아닌 소박함이 묻어나는 작은 내 집으로 들어서니 살갗을 스치는 평온한 공기 그리고 뭔가 모를 희열에 입 꼬리가 절로 올라간다. 방안에 날아다니는 작은 나방, 뒤뚱거리며 몇 마리를 잡아도 어디선가 끝없이 생겨나 온통 신경이 곤두선다. 내 신경을 발끈하게 한 것은 나의 보물창고인 다용도실이었다. 그곳엔 다양한 오가리가 있었다. 이름표를 달고 있는 오가리봉지 아래 모래알보다도 더 작은 알갱이들이 수북이 가라앉아 있었고 얼기설기 거미줄이 엉겨 붙어 있다. 너무 아까워 먹지도 못하고 바라만 보며 아끼는 늙은 호박오가리다. 봉지를 열어젖히자 나방들이 불꽃을 보고 달려든 불나방처럼 바시랑거리며 탈출을 해 여기저기 벽마다 분분하다. 이미 오가리는 볕뉘 들어올 정도로 바늘구멍처럼 작은 구멍이 숭숭 나 있는 것이 엑스레이로 보았던 예전의 어머니의 골다공증 뼈랑 흡사했다. 금방 만지기만 해도 바스러질 것 같았다.

매년 늙은 호박오가리를 열심히 만들었다. 오가리를 보면 어머니의 따스함과 아픔이 느껴진다. 그래서 가끔 열어보곤 했다. 입원하기 전에 열어보고 잘 간수하지 않았던 탓에 벌레가 생긴 모양이다.

여름날이면 시골집 장독대의 항아리 뚜껑 위에 고들고들한 호박고지를 만들었다. 쫄깃쫄깃한 호박고지로 볶음을 하거나 짜글짜글 된장국을 끓이면 우리 입맛을 사로잡았다. 호박고지로 만들지 않은 늙은 호박은 겨울 양식으로 쓰인다. 그 늙은 호박은 윗목에 지푸라기로 만든 똬리 위에 올려놓았다. 누런 호박으로 호박죽을 만들어 먹고 또 호박 설기 떡을 만들면 그 맛이 일품이다. 어머니는 표면에 하얀 가루가 많아야 달다고 하셨다. 매끄럽고 윤기가 흐르며 단단하게 잘생긴 늙은 호박은 안방에 두고, 거칠고 흠집 있는 늙은 호박은 오가리로 만들었다. 하얀 가루가 당분이 높고 여러 번 이동하면 호박 속 조직이 흔들려 안에서부터 썩게 되므로 자주 옮기지 말아야 한다는 지혜는 과학적 근거는 모르겠으나 어찌 그리 딱 들어맞는지 놀랍다.

식칼이 잘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딱딱하다. 이런 단단한 호박을 자르기 위해선 한번 칼집을 내면 쉽게 칼이 들어가는데 그럴 때면 어머니 손등 심줄이 퍼렇게 띄어 나왔다. 입을 악 무르시고 늙은 호박 껍질을 벗기실 때면 덩달아 내 손에도 힘이 들어간다. 이내 발가벗긴 못난 늙은 호박, 통통한 아기 엉덩이처럼 매끈하게 반짝이는 호박을 숭덩숭덩 썰어 대나무자리에 널어놓는다. 햇빛과 바람을 맞으며 마르는 오가리, 손길을 많이 주어야 단맛이 난다며 뒤적일 때마다 조금씩 변하는 오가리, 탱탱하던 모습은 어머니 손등처럼 쭈글쭈글 변해갔다. 친정엔 계절마다 장독이나 처마 밑에서 어머니 손길 따라 대나무발 위에서 여러 가지 오가리가 만들어졌다.

선상에서 모진 풍파를 맞으며 말린 오징어가 맛있는 것처럼 늙은 호박도 찬바람을 맞으면서 얼었다 녹았다 해야만 맛좋은 오가리가 된다. 짙은 주황색에서 허연색을 띠며 꼬들꼬들 늙은 호박은 일품오가리로 탈바꿈한다. 애지중지했는데 벌레습격으로 성성해진 오가리는 깁스를 푼 내 발 모양과 너무나 흡사한 몰골이다. 그 모습은 마치 돌아가신 어머니 모습 같아 목울대가 뻐근해진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는 말이 있듯이 언제나 아픈 손가락이었던 나, 오가리는 나의 어머니향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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