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범부의 고해성사
어느 범부의 고해성사
  • 김기원<시인·문화비평가>
  • 승인 2016.06.08 19: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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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원의 목요편지
▲ 김기원

늦은 고해성사를 합니다.

천주교 신자라 일 년에 두 번은 성당에서 고해성사를 합니다만 미처 고백하지 못한 죄들이 많아 굴비 엮듯 엮어서 고해 올립니다.

이순을 조금 넘긴 나이,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나이입니다. 100세 시대를 감안하면 산 날의 3분의 1을 더 살아야 하는 나이입니다.

공직에서 은퇴한지도 5년이 다 되어 가는데 무슨 놈의 죄가 이리 많은지 놀라자빠질 지경입니다.

어머니는 인형처럼 예뻤지만 키가 아주 작았습니다. 어머니한테 대놓고 말은 못했지만 철딱서니 없이 키 작은 엄마를 원망한 적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심성 좋고 힘이 장사인 팔척장신이었으나 하시는 일마다 운이 따라주지 않아 신역이 고된 삶을 살았습니다.

자식들 고등학교도 제대로 못 보낸 가난과 무능이 한스러웠습니다.

그래도 칠남매 중 장남이라고 저만은 어렵사리 고등학교를 보냈는데, 명문대학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말단공무원이 되어 타향살이를 했습니다.

간암에 걸린 아버지를 수술 한 번 해드리지 못하고, 좋아하시던 술도 한 번 실컷 사드리지 못한 채 50대 중반의 아까운 나이에 저 세상으로 보냈습니다. 40대 후반에 홀로 된 어머님 또한 두 손자를 키우다가 병을 얻어 70도 살지 못하고 아버지 곁으로 가셨습니다.

모두 제 무능하고 가증스러운 불효 탓입니다. 어처구니없는 거짓말도 했습니다. 돼지우리 같은 집이 창피해서 이웃한 삼촌 집을 우리 집이라고 속인 적도 있고 Y대학 국문과 학생이라고 사기도 쳤습니다.

삶의 고비 때마다 도와주고 용기를 북돋워준 분들이 있었습니다. 덕분에 오늘의 제가 있지만 여태껏 보은하지도 못하고 지질하게 살고 있습니다.

젊었을 때는 술도 미친 듯이 마시고 객기도 많이 부렸습니다. 그러나 정작 불의를 보면 침묵하거나 적당히 타협하려 했습니다.

객기도 있고 오기도 있었으나 진정한 용기가 부족한 졸장부였습니다. 전두환·노태우 정권이 싫었지만 생계 때문에 공직을 뛰쳐나올 수 없었습니다. 아니 알량한 승진을 위해 정권에 시녀로 살았습니다.

위선자였고, 민주화에 무임승차한 청춘이었습니다.

책임지지 못할 사랑도 꽤나 했습니다.

만남과 이별을 거듭하며 많은 추억을 쌓았습니다만 그들의 선의를 끝까지 지켜주지 못했습니다.

고정관념과 편견에 사로잡혀 오류를 범한 적도 많았고, 실없이 던진 경박한 말들이 본의 아니게 남에게 상처가 되기도 했습니다.

얄팍한 지식으로 아는 척했고, 잘난 척ㆍ있는 척 허장성세를 하며 교만을 떨기도 했습니다.

술에 취하면 고성방가와 노상방뇨를 대놓고 했고, 교통법규도 무시로 어겼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성당에 가선 경건하게 기도하고 성가도 곧잘 부르지만 돌아서면 언제 그랬냐는 듯 늘 그 턱이었습니다.

자신의 구복은 빌면서 남을 배려하는 데는 인색했습니다.

돌아보니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참으로 많은 죄를 지었습니다.

인생이란 이처럼 죄를 짓는 바퀴와 속죄하는 바퀴를 달고 달리는 수레였습니다. 탐욕과 집착의 짐이 무거우면 평탄한 길에도 펑크가 나 주저앉게 되고, 마음을 비우고 욕심덩어리를 내려놓으면 험한 자갈길도 거뜬히 달리는 수레였습니다.

죄 많은 제 인생수레는 오늘도 기우뚱기우뚱 위태롭기 그지없습니다. 하여 염치없는 고해성사로 용서를 빌며 기도합니다.

저는 벌 받아 마땅하오나 제게 도움을 주신 분이나 저로 인해 상처받은 분들만은 부디 위로해주시고 축복해주시기를 간절히 청합니다.

남은 생 또 어떤 죄를 짓고 살지 모르지만 이 못난 죄인을 위해 기도해 주는 그대가 있어 안도합니다.

고맙고 또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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