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 서면
그곳에 서면
  • 박명애<수필가>
  • 승인 2016.06.07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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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박명애

아직 유월인데 땡볕이다.

논물이 찰랑대는 들 어린 모들의 푸른 날숨을 싣고 오는 바람도 후끈하다.

이정표를 따라 우회전한다. 삼년산성. 눈길로만 스쳐 지나며 한 번 가봐야지 마음으로만 수십 번 올랐던 곳인데 마침 일과 관련하여 답사할 일이 생기니 살짝 설렌다. 삼년산성은 보은 오정산 정상 부근에 세워진 신라의 산성이다. 신라 자비왕 때 산성을 쌓았는데 삼년 걸렸다 해서 삼년산성이라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전해온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삼년산성으로 오르는 길. 시멘트 포장이 마뜩찮은데 어디서 왔는지 꿩 한마리가 단풍나무 그늘 속을 종종걸음으로 앞서가며 안내를 한다.

다 지고 드문드문 남은 찔레꽃 내음도 살풋 묻어온다. 삼십년 전만 해도 성으로 들어가는 길은 숲속의 작은 오솔길 뿐이었다. 그 비탈길이 어암리 일대를 왕래하는 유일한 길이었다니 산성으로 오르기 쉽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정문인 서문지 앞에 다다르니 웅장한 성벽이 앞을 가로막는다. 구들장처럼 납작한 돌을 정(正)자 모양으로 쌓았다.

안쪽은 흙으로 내부를 채우는 다른 산성과 달리 내부까지 견고하게 돌로 채워졌다.

서문 양쪽으로는 둥근 곡성이 마주보고 있다. 둘레가 25m나 되는데 적들이 성으로 접근하기 쉬운 능선과 연결되는 곳에 축조해 성을 방어했다고 한다.

보은은 5세기 후반 고구려 백제 신라가 국경을 맞댄 곳으로 한강으로 가는 중요한 길목이었다. 신라가 장정 3000명을 동원해 개축할 정도였으니 최전방으로서 삼국통일로 가는 교두보 역할을 했던 전략적 요충지였다.

고구려-백제 틈바구니에서 시달리던 신라는 이 철옹성 덕분에 명실상부한 삼국중 하나로 발돋움한다.

새로 복원한 성곽과 옛 성곽이 맞물린 서남 성곽은 너무 깔끔하여 오랜 역사에 비해 고졸한 멋이 적다.

성벽 옆길을 걸어 올라가니 보은 읍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높은 산도 아닌데 성 둘레를 따라 사방이 내려다보인다. 동서남북 어느 쪽으로든 막힘없이 나갈 수 있는 교통의 요지임을 실감한다.

성을 쌓은 뒤 전쟁에서 한 번도 내어준 적이 없을 만큼 포기할 수 없었던 까닭을 알 것 같다.

삼국 중 가장 열세에 놓여있던 신라가 오래전부터 북진의 꿈을 키웠던 것일까? 앞을 읽는 지혜로움과 뛰어난 축성기술이 놀랍기만 하다.

서남 성곽과 달리 남문지로부터 동문지 북문지로 이어지는 성곽은 옛 자취가 그대로 남아있다. 오랜 풍상을 겪은 돌들이 군데군데 허물어져 지나간 시간을 얘기한다.

저 돌 하나마다 산성을 쌓기 위해 멀리 경북 선산에서 이곳 보은까지 동원되었던 이름 모를 장정들의 염원과 눈물이 스며있으리라.

포곡성이라 능선을 따라 이어진 성곽은 아늑하게 성 내부를 감싸고 있다. 여인의 눈썹을 닮아 아미지라 이름 붙여진 연못엔 노란 창포가 피었다.

천 오백년 전엔 철을 두드리는 대장간 소리, 훈련을 받는 병사들의 함성으로 사기가 충천했겠지.

백제를 멸망시킨 뒤 태종 무열왕은 이곳 삼년산성에서 당나라 조서를 전달받는다. 그만큼 삼년산성은 신라의 자부심이었나 보다.

그가 머물렀을 행궁자리엔 작은 절이 들어서 있다. 내려오는 길 뽕나무엔 오디가 붉다.

역사의 현장에 서면 늘 가슴 먹먹하다. 오늘이 있기까지 그리고 오늘도 누군가는 치열하게 나라를 지킨다. 그렇게 민초들은 늘 목숨을 걸었다.

잊지 말아야지. 반성문처럼 되뇐다. 적막한 성곽위로 또 하루의 역사가 내려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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