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의 발자취를 찾아서 <49>
기독교의 발자취를 찾아서 <49>
  • 충청타임즈
  • 승인 2006.12.13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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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리성지
무명 순교자 잠든 곳엔 거룩함만이…
신 준 수 <객원기자>
   
▲ 최초의 근대적 충판 인쇄소 역할을 했던 손토마스의 집

 한국의 '카타콤바' 신리성지

신리성지는 한국천주교 순교사에 관한 자료를 집대성하여 정리, 편찬한 곳으로 우리 나라 최초의 근대적 출판 인쇄가 시작된 곳이며, 한강 이남 교회의 '교구청' 역할을 하기도 했던 곳이다.

복음 선포 위해 교회사 책으로 엮어

제3대 조선교구장인 페레올 고 주교가 선종하고 후임으로 온 베르뇌 장 주교에 의해 부주교로 임명된 성 안 안토니오 신부는 효과적으로 복음을 선포하고자 출판 사업에 심혈을 기울여 책자 번역 및 한국 순교자들의 전기와 교회사를 엮었다. 당시 20여평 되는 목조 건물로 1815년에 지은 초가집에서 이러한 많은 인쇄물을 찍어냈다. 그러나 이 인쇄소는 1863년에 불이나 많은 서적과 함께 소실되었고, 지금은 그 때 불에 탄 서까래, 현 고소 강당의 대들보 위에는 '1815년 상량'이 라는 글귀가 남아 있다.

1866년 제4대 조선교구장이던 베르뇌 장 주교의 순교 후 제5대 조선교구장이던 안 안토니오 주교와 위앵 민 신부, 오매트르 오 신부, 장주기 요셉, 황석두 루가 성인들이 순교를 위해 체포됐으며, 손자선 토마스 등 많은 순교자를 배출한 곳이다.

우선 신리성지를 가려면 충남 당진군 합덕읍에서 예산방향 32번 국도를 타야 한다. 2km쯤 가다 서야중·고등학교 앞 사거리에서 우회전해 4km 정도 가다 신리성지 표지판을 따라 들어가면 단정하게 정돈 된 성지에 다다른다.

성지를 들어서면 수녀원으로 사용되는 한옥 한 채와 성당, 식당, 때론 단체 순례객들의 잠자리로도 사용되는 임시 강당 한동이 방문객을 맞는다.

수녀원 앞 성지광장 한편에 이제 막 원형복구 작업을 끝낸 20평이 채 안되는 초가집은 1815년에 지은 것으로'성 안 안토니오' 주교가 기거하던 곳이다. 이곳은 배교자 이선이의 밀고로 '안 다블뤼 주교'가 잡힘으로써 무명, 유명 순교자를 내면서 완전히 파괴되고 만 곳으로 한국의 카타콤바(로마의 지하성당-초기 기독교 시대의 비밀 지하묘지. 로마 황제의 박해를 피하여 죽은 사람을 그곳에 매장하고 예배를 드리던 곳)라 일컫는 곳이다. 조금 떨어져 '성 안 안토니오 다블뤼' 주교를 기념하는 신리 성당이 자리하고 있다.

1972년 연고자 없는 군교자의 묘 발굴

 무명 순교자들

단정하게 정돈된 초가집 뒤 사과 밭을 지나다보면 '손자선 성인' 가족묘 14구의 14봉분이 길 옆으로 이어져 있고. 그 옆으로는 봉분도 없이 십자가 6개만 서 있는 묘가 있다.

이곳은 1972년 봄, 손자선 성인의 선산이던 이곳이 과수원으로 개발되던 중 연고자 없는 32기의 묘가 발굴됐다. 한결같이 분묘마다 목이 없는 시신과 묵주가 함께 나왔다. 목 없는 순교자 시신 32구가 6개의 사과상자에 나뉘어 묻혀 있는 무덤이다. 이들 시신은 당시 신자들에 의해 1km 떨어진 공동묘지에 6개 봉분으로 이장됐다.

1985년 2차 파묘 때 14기의 무연고 묘가 또 발굴됐다. 대전리에 있는 십수기의 묘는 손씨 가문의 치명자라는 구전(口傳)에 의해 십자가와 함께 발굴된 이들 14기의 묘는 손씨와 치명한 가족의 묘로 여겨져 이장했다.

현재 신리성지에는 대전교구장 경갑룡 주교의 요청으로 지난 2002년 2월부터 샬트르 성바오로회 서울관구 소속 권마리에따 수녀와 허공사가 수녀가 파견돼 성지를 돌보며 활동중이다.

이곳 초가집은 본래 손토마스의 집으로 마을에서 최대 부호였다. 그러나 일가들이 거의 순교하고 집마저 다른이의 소유가 됐다. 1927년 4월, 이를 안타깝게 여기던 신자들과 당시 합덕본당 7대 주임이던 페렝 백신부가 이 집을 사들였고, 1954년부터 뼈대는 둔채로 양철지붕을 얹어 공소로 사용해왔다. 1964년에 천정 보수공사를 한 적이 있으나 40년간 방치되어오다 2003년 9월부터 안주교 당시의 초가집 복원작업에 들어가 오늘에 이른다.

신리성지 권마리에따 수녀는 "성지 숙원은 기념성전 건립과 무명순교자 유해안치 작업"이라며 "주교관 복원은 은인들의 도움으로 마무리지은 상태지만 성전건립엔 경제적어려움이 따른다며 신자들의 기도와 관심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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