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목련
백목련
  • 충청타임즈
  • 승인 2006.12.13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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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사랑의 열매입니다
오 미 경 <동화작가>

지난 목요일, 1주일에 한 번씩 나가 이주여성들에게 한글 가르치는 일을 돕고 있는 인권센터 사무실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토요일 오후에 고속도로 톨게이트에서 모금행사를 하는데 참여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아이들 수업도 있는데다, 주말마다 이런 저런 일로 자주 집을 비워 주말부부인 남편에게 미안하기도 해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하실 분이 정 없으면 몰라도 사정상 어렵겠다고 했더니 잠깐 기다리라며 전화를 바꾸어주었다.

평소 오지랖이 넓어 남의 어려운 사정을 알면 그냥 넘어가지 못하고, 자기 자신보다는 늘 남을 먼저 챙기는 김 선생님이었다. 이젠 꼼짝없이 걸렸구나,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김 선생님은 그런 일도 해봐야 글도 잘 쓴다, 세 시간 동안 아주 재미있게 해주겠다, 어쩌며 너스레를 떨었다. 난 결국 승낙을 했다.

토요일, 1시가 조금 넘자 집 근처라며 김 선생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는 옷을 단단히 껴입고 나섰다. 차에서 김밥으로 간단히 점심을 때우며 오창 톨게이트로 갔다. 휴게실로 들어서자 함께 모금 행사에 참여할 사무실 직원들과 자원봉사 선생님 한 분이 먼저 와 있었다. 나까지 포함해서 여섯 명, 모두 주부들이었다.

우리가 해야 하는 구호는 '안녕하십니까 사랑의 동전 모금함입니다'라고 했다. 발음하기가 좀 어려워 우리는 모금함에 쓰여 있는 '사랑의 열매'에서 힌트를 얻어 '안녕하십니까 사랑의 열매입니다'로 하기로 했다. 나름대로 전략을 짠 뒤 두 명씩 짝지어 통행료 받는 곳 옆에 나란히 섰다. 나랑 짝인 김 선생님은 모금함을 들고 나는 사랑의 열매가 든 봉지를 들었다.

우리가 서 있는 차로를 향해 차 한대가 달려왔다. 난생 처음 해보는 일이라 가슴이 조금 두근거렸다. 운전자가 고속도로 통행료를 계산하는 동안 우리는 입을 모아 최대한 상냥한 목소리로 외쳤다. '안녕하십니까 사랑의 열매입니다.' 차 서너 대가 그냥 지나쳤다. 쉬운 일이 아니구나, 싶었다. 또 차들이 달려왔다. 우린 목소리 톤을 높여 다시 외쳤다. '안녕하십니까 사랑의 열매입니다.' 드디어 운전자 한 분이 통행료 거스름돈으로 받은 잔돈을 넣어주었다.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십시오.' 우린 우렁차게 인사를 했다. 그 운전자가 얼마나 고맙고 멋져 보이는지, 가슴이 다 찡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쑥스럽던 마음은 사라지고 어느새 우린 선수가 되어 가고 있었다. 서로 곁눈질로 어느 모금함이 더 많은가 비교도 해보고, 새로운 구호도 즉석에서 만들어서 외쳤다. '사랑을 나누어주십시오. 따뜻한 사회를 만듭시다. '

우리 곁을 지나치는 운전자들의 모습은 그야말로 천태만상이었다. 통행료 거스름돈 말고 따로 지폐를 꺼내 몇 장 넣어주시며 수고한다는 인사말까지 챙겨주시는 분, 껌 통 안에 가득 모은 동전을 통째로 건네주시는 분, 거스름돈으로 받은 돈을 모두 넣어주시는 분, 거스름돈 중에서 동전만 넣어주시는 분, 거스름돈에서 지폐 한 장을 빼서 넣어주시는 분, 거스름돈을 다른 쪽 손에 움켜쥐고는 쏜살같이 지나치는 사람, 가는 곳마다 있다며 화를 내고 가는 사람, 대통령한테 받으라는 사람. 어떤 분들은 거스름돈으로 받은 동전 몇 개 또는 천 원짜리 지폐 한 장을 넣고는 액수가 적어 미안하다는 듯 쏜살같이 줄행랑을 치기도 했다.

돈을 넣는 모습들도 천태만상이지만, 사람들의 표정 또한 그랬다. 기분 좋은 웃음을 보내주는 사람들, 객쩍은 미소를 보내주는 사람들, 우리가 강도나 장사꾼이라도 되는 양 가시돋친 눈길을 보내는 사람들, 어색한 표정으로 눈길을 피하는 사람들.

돈 몇 푼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페인트 자국으로 얼룩진 작업복을 입은 운전자가 통행료 거스름돈으로 받은 동전 몇 개를 주머니에 넣은 뒤 낡은 트럭을 끌고 지나치는 모습을 보면 괜히 마음이 짠했다. 그럴 땐 모금함을 들고 서 있는 게 괜히 미안하기까지 했다. 높은 화물트럭 운전석에서 팔을 어렵게 뻗어 동전 몇 개를 던져주는 분들은 또 얼마나 고맙던지. 그런가 하면 번지르르한 외제 차를 몰고 동전 하나 넣지 않고 유유히 사라지는 사람들을 보면 괜히 마음이 씁쓸했다. 나는 몇 시간 동안 무수한 통행자들을 지켜보며 저 많은 사람들 중에 내 모습은 어떤 것일까 가늠해 보았다.

없는 사람들에겐 더 외롭고 추워지는 세밑이다. 내 가정의 온기도 내 주변이 건강하고 따스할 때 더 오래도록 지켜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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