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준이의 오월
성준이의 오월
  • 이수안 <수필가>
  • 승인 2016.05.08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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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가는대로 붓가는대로
▲ 이수안

오월의 신록은 성장이 빠르다. 가만히 마음 기울이면 세상 온갖 초록의 함성이 들리는 것만 같다. 내 마음의 귀에는 이 함성이 살아있음의 기쁨으로 들린다.

콘크리트 갈라진 틈바구니에 뿌리내린 생명이라 할지라도, 살아남아 꽃피우고 씨앗을 남기리라는 열망으로 분주한 오월이다.

우리 사는 세상도 기쁨을 나누느라 분주하다.

서연이는 어미·아비의 손을 잡고 설성공원에서 열린 어린이날 행사에 가서 많이 웃고 왔다. 어버이날을 맞아 큰아이 내외도, 작은아이 내외도 시부모님께 인사를 갔다.

나를 위한 어버이날 행사는 지난주에 근사한 식당에서 미리 치렀다. 너나없이 바삐 사는 세상이다. 이나마 날짜를 정해놓지 않았다면 형식적인 기쁨이라도 누릴 기회는 더 적지 않았을까. 아이들은 뛰어놀고, 어른들은 그 손주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달 오월. 그러나 오월이라 더 아픈 가슴들도 있다.

열네 살 성준이는 가습기 살균제 피해로 폐가 심하게 손상되었다. 숨을 쉬기 위해 목에 구멍을 내 산소 튜브를 끼고 생활했다. 자기 몸무게의 절반이 넘는 무게의 산소통도 항상 끌고 다녀야 한다. 한창 뛰어야 할 열네 살…. 성준이는 체육 시간을 어떻게 보낼까.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먹먹해진다.

이 가습기 살균제는 판매가 중단될 때까지 10년 동안 유통되어 500만 명이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피해자로 인정받은 사람은 단 221명이다. 피해 증세가 그 때문이라는 걸 증명해야 하는데, 해당 제품을 샀다는 증거를 찾는 것이 사실상 어려워서다.

성준이 가정도 이런 어려움으로 막막할 때 오래된 앨범에서 사진을 한 장 발견했다. 성준이가 아기였을 때 크리스마스이브 날 주방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이다. 성준이를 안은 아빠, 그리고 행복한 표정의 가족들….

그 뒤 배경으로 주방 창틀이 보이고, 그 창틀에 문제의 가습기 살균제가 세워져 있다. 그러나 이 사진을 찾지 못했다면 성준이가 가습기 살균제 피해로 폐가 손상되었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한단 말인가.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해당 제품을 생산한 <옥시> 측의 대응이다. 그동안 피해자들의 호소를 외면하던 옥시, 언론 인터뷰조차 거부하던 옥시가 검찰의 수사가 시작되자 피해자 발생 5년 만에야 공식 기자회견을 연 것이다.

그것도 피해자와 그 가족에게는 연락하지 않고 기자들만 모아 사과했다. 코가 땅에 닿도록 절하는 옥시 측의 사과에 피해자들을 향한 진심 어린 사죄의 마음이 과연 담겼을까.

오월의 신록은 너무도 싱그러워 찬란하도록 빛나는데, 세상은 이리도 무정하고도 차갑다. 그 무거운 산소통에 의지해야만 숨을 쉴 수 있는 성준이, 그리고 드러나지 않은 또 다른 성준이는 이 냉정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까.

성준이가 용기를 내서 잘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는 것 같다. 그 이야기를 들어 주고 아픔을 공감해 주는 것, 내가 기쁠 때도 잠시 그 아픔을 기억하며 해당 기업의 제품을 쓰지 않는 것 외에는.

그러면서도 염치없이 소망해 본다.

콘크리트 틈새를 비집고 기어이 살아내는 저 오월의 신록을 보면서 힘을 내라고. 활동도, 말도 부자유스럽지만 힘내서 살아달라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기쁨도 누리며 살라고. 그것이 너를 이 오월의 신록보다 더 싱그럽고 빛나는 한 인간으로 잘 성장시켜 줄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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