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대한 단상
집에 대한 단상
  • 안희자<수필가>
  • 승인 2016.04.12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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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안희자

화창한 오후, 건너편 아파트에 이삿짐이 부려진다. 사람이 살면서 집을 몇 채나 갖고 사는지 궁금해질 때가 있다. 저마다 삶의 기준이 달라 많고 적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중에서 나는 작은 아파트 한 채는 갖고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지 싶다. 고층에 살고 있어 사계의 풍경을 내려다보고 즐기기에 손색이 없는 곳이다. 크지 않아도 좋다.

그 풍경 사이로 내 젊은 날이 겹쳐진다. 결혼 후 남편의 전출로 인해 서울에 살던 적이 있다. 변두리 후미진 곳에서 셋방살이했다. 어두운 지하 단칸방, 그곳은 밤낮을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종일 햇볕이 들지 않았다. 석유곤로에 밥을 지었고 밖의 공동 수돗가에서 빨래했다. 여름에는 곰팡이 냄새 배고 겨울에는 솜이불을 덮어도 냉기가 돌았다.

그해 여름, 하늘이 구멍 난 듯 장대비가 퍼부었다. 그날 밤 남편은 당직근무 서고, 둘째를 가진 나는 잠투정하는 큰아이를 재우고 잠이 들었다.

그런데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자 척척했다. 잠결에 놀라 깨어보니 아이의 요와 이불이 흠뻑 젖어 있고 몸은 얼음덩이처럼 차가웠다. 밤새 내린 비가 방안으로 스며든 것이다. 방수가 안 된 탓이었다. 기가 막혔다. 보채는 아이를 등에 업고 밤새워 바가지로 물을 퍼냈다. 설움에 겨워 눈물이 흘러내렸다. 다음 날 퇴근하고 온 남편에게 나는 바가지를 긁을 수가 없었다.

그 후 나는 집 장만에 허리띠를 졸라맸다. 누런 월급봉투를 손에 쥐는 날이면 우선 쌀을 사고 연탄을 들였다. 그런 날은 부자가 된 듯 가슴이 뿌듯했다. 안타깝게도 맨손으로 시작한 살림살이는 녹록하지 않았다. 애들 옷은 언니에게 얻어다 입히고, 낡은 소쿠리조차도 모기장을 덧대어 꿰매 쓰기도 했다. 그 중에도 생활비 쪼개 저축하여 목돈 마련했을 땐 기분이 흐뭇했다.

남편이 퇴근할 무렵이면 나는 아이를 업고 마중 나갔다. 그때 남편은 아이의 간식거리를 자전거 뒷좌석에 매달고 왔다. 아이를 태우고 들꽃 술렁이는 둑길을 걸으며 집으로 돌아오던 추억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어쩌다 월급날 한번 먹는 자장면은 어찌나 맛있던지 꿀맛이었다.

그뿐인가. 그 시절 이웃에 누가 사는지, 숟가락이 몇 개인지, 그 집안 형편을 속속들이 알았었다. 기쁜 날은 떡을 돌리고, 여름이면 다 함께 반찬 들고 나와 큰 양푼에 비벼먹던 추억은 정겨웠다. 그들은 친척도 아니고 고향 친구도 아니다. 질투하고 헐뜯는 것이 아니라 서로 아픔과 기쁨을 공유해서 다 함께 사는 것이었다.

돌아보면 가난했지만, 내 인생의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 아니었나 싶다. 누추하고 옹색한 공간이었지만 도담도담 자라는 아이의 웃음소리와 온기로 가득 채워졌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세입자로도 살았고 주인세대로의 삶도 있었다. 철새처럼 옮겨 다니며 세를 살다가 내 집을 장만했을 땐 세상을 다 얻은 듯했다. 집의 평수가 무슨 대수랴. 비가 새지 않아서 맘 편히 쉴 수 있는 집, 그 속에 살 비비고 사는 가족들이 있잖은가.

요즘 대부분 맞벌이로 살다 보니 이웃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는 세상이 되었다. 물질은 풍요롭지만 마음이 궁핍한 시대. 지금 어디선가 방 한 칸 구하기도 버거워 눈물 흘리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떠날 때 땅 한 평이면 족한 것을 우리는 마지막까지 욕심을 부리며 산다.

화창한 이 봄, 아늑한 내 집에 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새삼 감사할 일이다. 내려다보는 풍경도 좋다. 비록 작고 초라한 집이지만, 해 질 녘에 돌아와 편히 쉴 수 있는 금싸라기 같은 집이다. 결코‘행복은 부와 비례하지 않는다.’는 말이 또 하나의 경전으로 내 귀를 재운다.

젊은 날 인생의 쓴맛을 보며 가족들과 이웃들이 사랑 채우며 살던 그 시절 그곳이 그립다. 그래서 집은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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