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날입니다
최고의 날입니다
  • 김용례 <수필가>
  • 승인 2016.03.17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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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김용례

때를 맞추는 일이 쉽지 않다. 세 번째 걸음이다. 꼭 이맘때 다녀간다. 그런데 제대로 만나본 적이 없다. 아직 오지 않았거나 다녀간 흔적만 보고 서운한 마음만 안고 돌아왔다. 그래서 이번엔 더 간절하게 보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세 시간 반을 쉬지 않고 달려왔다. 이제 몇 발짝만 오르면 볼 수 있다.

금둔사 일주문 앞에서 급히 올라가는 내 모습이 안타까웠는지 먼저 보고 내려오시는 두 분 수녀님께서 “최고의 날입니다” 하신다.

납월은 섣달이다. 섣달 눈 속에서 피어난다 하여 납월매라고 한다. 매화를 입에 물면 봄이라고 했던가. 사람들은 한겨울 추위를 견디고 눈 속에서 피는 매화를 보려고 먼 길을 달려온다. 눈 속에서 고요히 피어 있는 납월매를 보면 숙연해진다. 큰소리 내지 않아도 어려운 사람 앞에 서 있는 듯 조심스럽다.

매화를 보고 문필가들이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던 것을 이제야 조금 알 듯하다. 내려가시던 수녀님들이 “최고의 날입니다” 라고 한 뜻을 알겠다.

수녀님께서는 오늘 매화가 예쁘게 피었다 말을 최고의 날이라고 하셨다. 나는 비를 맞으며 곱게 핀 매화의 애틋함이 잔영으로 남아있지만 그러나 최고의 날이라는 말이 더 깊이 남아있다.

우리는 순간순간 느끼는 충만함을 잊고 조금 불편하고 괴로웠던 일을 가슴에 새기고 살기 때문에 최고의 시간을 놓치고 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갗라는 명저를 남긴 스위스의 사상가 카알 힐티는 내 사명을 깨달은 날이 내 생에 최고의 날이라고 했다. 그렇구나, 금둔사의 납월매는 가장 먼저 피는 사명을 알고 오늘 그 사명을 행함에 있어 가장 아름답게 피워낸 날이구나.

금둔사를 다녀와 서른의 딸에게 물었다. 너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최고의 날이 있었느냐고, 딸의 대답은 간단했다. 아직 없다는 것이다. 시고 떫은, 아직 앞으로 갈 줄밖에 모르는 서른 살, 어쩌면 당연한 대답일지도…. 늘 최고의 날을 향해 가는 젊음은 한방에 갈 수 있는 최고의 순간을 기대할 것이다. 인생에 그런 한방에 떨어지는 것은 없다는 것을 모르리라. 나도 갱년기를 지나 검은 머리보다 하얀 머리가 더 많아지고 시어미가 되고 나서야 그것을 알았다.

생에 최고의 날을 꼭 하루만 꼽으라는 것은 한 가지 답변만 요구하는 답답한 일이다. 사소한 하루하루 중에 정말 읽고 싶었던 책을 선물로 받았을 때. 며칠 흐리다가 맞이한 햇볕이 좋은 아침, 마음속으로 존경했던 선배님에게 밥 먹자는 연락을 받고, 생각해보면 매 순간 최고다. 순간순간이 이어져 하루가 되고 삶이 되는 것이다. 납월매는 조금 춥다고, 제일 먼저 피었다고 호들갑을 떨지 않는다. 이제는 누구의 잘잘못을 따지고 경쟁하는 것보다 작지만, 상대방에게 따뜻한 마음을 전하는 것은 어떨까.

일 년에 한 계절 피었다 지는 꽃은 때를 맞추기가 어렵지만 사랑의 말로, 작은 선물로 지금까지 내게 사랑을 준 그들에게 최고의 날은 아닐지라도 웃음을 나누는 순간을 함께한다면 그 또한 나에게 최고의 날이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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