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의 봄
유년의 봄
  • 박경희<수필가>
  • 승인 2016.03.06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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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가는대로 붓가는대로
▲ 박경희

꽃이 피어서 봄인가. 아니면 봄이어서 꽃이 피는 것일까.

이제 바야흐로 철쭉과 진달래의 계절이다. 겨울동안 움츠렸던 몸과 마음이 밖을 향해 나서는 계절이 된 것이다. 봄은 말만 들어도 가슴이 훈훈하고 젊음이 느껴지는 계절이다. 새로운 삶이 약동하는 봄은 사랑이 샘솟고 아름다운 향기가 묻어난다.

멀리 도심 외곽으로 보이는 산등성엔 며칠 전 내린 춘설이 쌓여 있다. 바다를 건너온 바람은 잠자던 씨앗들을 깨우고 나뭇가지를 타고 밭두렁을 지나 산골짜기로 올라 산등성을 넘으며 진달래 연분홍 꽃을 피울 것이다.

시선을 돌려 작은 공원을 본다. 햇살 닮은 노란 산수유가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다.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의 옷차림 또한 밝고 고운 파스텔 톤으로 화사하다.

또각또각 발자국 소리를 내며 걸어가는 여인의 연 하늘색 신발 끝에서도 봄이 걸어오고 검게 그을렸던 잔디 위에도 연초록빛으로 봄이 오고 노점상 아줌마의 펼쳐진 옷가지에서도 봄은 묻어 있다.

도시의 살찐 비둘기도 봄나들이 나왔는지 공원을 뒤뚱뒤뚱 걷고 있다. 엄마 따라 나들이 나온 어린아이가 두 팔 벌려 잡으려하자 푸드득 날아오른다. 놓쳐버린 비둘기를 향해 “잘갚 하고 손을 흔드는 욕심 없고 천진스런 아이의 얼굴에도 봄이 왔다.

꽃이 피고 바람이 부는 일상의 하루. 그 사소한 것들의 고마움에 공연히 눈시울 붉어지며 유년의 봄 길에 낭랑히 들려오던 도랑물 소리가 그리워진다. 두툼하게 얼어 있는 곳을 한 발로 쿵쿵쿵 굴러 보지만 쉽사리 깨지지 않는다. 얼었다 녹았다 반복하며 겹겹이 단단히 얼어 있다. 그 견고한 얼음장 밑으로 들려오는 청량한 소리와 멈춘 듯 흐르는 도랑물은 유년의 산책길을 따라 흐른다.

겨울과 봄의 터널 같은 이즈음 산등성엔 아직도 흰 모자 눌러쓰고 음지쪽 잔설은 그림자처럼 남아 있던 날. 도랑가로 가재 잡으러 노란 양은 주전자 들고 아이들과 골짜기를 찾아갔었다.

돌멩이를 하나씩 들썩이면 추위에 놀란 가재는 웅크리고 있다가 이내 우리의 손에 잡혀 세상구경을 했다. 그렇게 흐르는 물 따라 올라가다 보면 어느새 깊숙한 골짜기에 가 있고 주전자 속에 고물고물한 가재들은 반쯤 들어차 있으며 발은 이미 물에 젖어있다. 손 또한 벌겋게 얼어 시린 감각마저 희미해질 때쯤 친구들과 의기양양하게 돌아온다. 내려오는 길 도랑가에 뿌리 적시고 살아가는 솜털이 뽀송한 버들강아지를 한줌 꺾어 안고 오면 봄은 그렇게 봉오리에 묻어 마을로 내려왔다.

결빙된 마음이 녹듯 얼었던 땅들의 녹아내린 질척거림으로 신발 밑에 달라붙던 흙덩이에서도 봄이 왔다. 밟으면 밟을수록 신발 가득 묻어나는 진흙처럼 우리네 삶의 부산물도 살아갈수록 자꾸만 늘어붙어 다닌다는 것을 몰랐던 그때, 어린 날의 봄은 빛깔보다는 바람으로 먼저 왔다.

부드러움 속에 칼날을 숨긴 미소는 어린 손등을 갈라놓는 생채기를 내며 겨울잠 즐기는 개구리를 깨워 하품을 토해내게 하는 짓궂은 심술에서도 시작되던 봄이다. 그런 봄맞이 속에서 보았던 버들강아지가 뽀시시 미소 짓고 있는 도랑가에 잔잔히 흐르는 물 따라 유년의 봄 길을 더듬으며 꼬투리 하나를 따서 손끝으로 헤집어 본다. 고이고이 접혔던 꿈들이 줄줄이 날개를 달고 날아오른다.

어린 날 날려 보낸 내 꿈처럼 맑은 하늘로 높이 날아오른 홀씨들을 보며 마을 뒤편 작은 도랑물 소리를 들으며 지천으로 파릇파릇 돋아난 새싹을 보며 알 수 없는 흥분으로 가슴 벅차던 그때를 생각한다. 돌담 밑에 하얗게 부서지던 햇살 속에서 꼼지락 깨어나는 자연의 소리를 들으며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꿈꾸던 유년의 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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