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막이
바람막이
  • 안희자<수필가>
  • 승인 2016.01.12 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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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안희자

춥다. 집안에만 갇혀 있으니 지루하고 답답하다. 이런 나를 제주에 사는 큰딸이 불러주었다. 매운바람을 가르고 비행기에 올랐다. 공항에 도착해 오랜만에 아이들과 마주하니 더없이 반가웠다. 설렘으로 맞이하는 제주도라는 인상 때문일까. 겨울이지만 햇살 좋은 봄날처럼 포근하다. 바람도 순하다.

겨울의 명소인 협재해변으로 향했다. 새해 겨울여행이라는 의미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른다. 해안도로로 차를 몰았다.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에 잠시도 눈을 뗄 수가 없다. 여기도 돌, 저기도 돌이다. 집집마다 울멍줄멍하게 둘러싸인 돌담이 어깨동무하듯 정답다. 밭과 밭 사이에 잿빛 돌담이 낮게 누워 한낮 풍경이 평화롭다. 돌은 쌓여 길이 되고 집이 되고 그들의 생활이 되고 신앙이 되었다니, 돌담은 천년 세월 동안 강풍으로부터 바람막이로서 그의 소임을 다했으리라.

협재해변에 들어서자 드넓은 수평선 위로 펼쳐진 바다 풍광이 눈에 든다. 마치 푸른 비단을 깔아 놓은 듯 매혹적이다. 신이 풀어놓은 물빛이 이러할까. 바람과 물의 조화인가. 물빛이 맑고 고와서 한 순간 옥빛으로 흐르다 푸른빛을 토해낸다. 차가운 겨울풍경이지만 따뜻하게 다가와 마치 어머니의 품속처럼 평화롭고 아늑하다.

이어 협재해변에서 신창사이 풍차다리를 건너기로 했다. 한때 인기드라마의 촬영지로 유명했던 이곳은 풍경이 아름답기로 그만이란다. 바다를 사이에 두고 다리 양옆으로 커다란 풍력발전기가 덜컹덜컹 힘차게 돌아가고 있다. 사진 한 장 담고 출발하여 이 멋진 다리를 건너는데 바람이 어찌나 심하던지 운치도 낭만도 느낄 수가 없었다. 모자는 벗어지고 바람에 떠밀려 오도 가도 못하는데, 그때 남편이 살며시 내 어깨를 감싸더니 손을 꼭 잡아주었다. 다행스럽게 긴 다리를 건너며 찬바람을 맞으면서도 편안하게 건널 수 있었다. 바람막이가 되어준 그가 고마웠다. 긴 다리를 건너자 언제 그랬냐는 듯 바람은 사라졌고 그 길 위에 에메랄드빛 바다가 눈앞에 펼쳐졌다.

사는 일도 인생의 바다를 건너는 것이리라. 내게도 거센 바람이 불었었다. 갖은 거라곤 없던 시절, 남편의 갑작스런 병마는 소박한 우리 가정의 웃음을 빼앗았다. 막막했다. 그는 큰 수술을 앞두고 아이들 걱정에 눈물을 흘렸다. 나는 그의 손을 잡고 약속했다. 끝까지 당신 곁을 지켜주겠다고. 그리고 그가 중환자실에서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 때 나는 그의 곁에서 단단한 울타리가 되어주려고 무진 애를 썼다. 황무지 같은 가정을 일구기까지 숱한 고비를 넘기고 여기까지 왔다. 나는 광활한 바다를 바라보며 힘겹게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았다. 누군가 절망스러울 때 곁을 지켜준다는 것은 꼭 필요한 존재가 아니겠는가. 나는 지금까지 식구들 바람막이로 살아왔다. 이제 남편과 자식들이 나를 챙긴다. 그래서 행복하다.

새해 제주의 청정한 바다를 걸으며 자연으로 한 걸음 더 다가간 여행은 답답한 마음을 풀어주기에 충분했다. 겨울풍경은 차가웠지만 푸른 물빛은 따스했다. 시간이 흐른 뒤에 다시 그리워질 것이다. 며칠간의 오붓한 여행은 즐거웠지만, 딸과의 헤어짐은 못내 아쉬웠다. 돌아오는 길, 내 가슴은 온통 푸른빛으로 물들더니 이윽고 푸른 바다가 출렁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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