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장갑
빨간 장갑
  • 이효순 <수필가>
  • 승인 2015.12.13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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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가는대로 붓가는대로
▲ 이효순

겨울 햇살이 따뜻한 주말이다. 그 햇살을 등에 받으며 흥덕사지 산책길에 접어든다.

햇살과는 달리 손이 시리다. 빨간 장갑을 낀다. 하마터면 못 낄 수 있었던 그 장갑이다.

눈길이 한 번 더 머문다. 혼자 소리 없이 웃는다.

지난주 첫눈이 제법 많이 내린 날이다. 우리 뜰의 작은 매화나무에도 흰 눈꽃송이가 듬성듬성 목화솜처럼 피었다. 그것을 곁눈으로 보며 저녁 시간에 성가 연습이 있어 남편과 함께 승용차 있는 곳으로 눈길을 조심스레 걸었다. 넘어질까 두려워서 다리에 힘도 많이 들었다. 승용차는 하얀 눈으로 모두 덮여 있다. 덮인 눈을 접은 우산으로 털고 교회로 향했다.

2시간 성가 연습을 끝내고 귀가하니 장갑이 보이지 않는다. 내 손가방을 몇 번 보아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차 안에도 다시 가서 살펴보았다. 그곳에도 없다.

집에서 가지고 나간 것은 생각나는데 어느 곳에서 벗었는지 생각나지 않는다. 머릿속엔 빨간 장갑으로 가득 차 있다. 그 장갑은 15년 전에 큰 아이가 군에 갔을 때 사준 내 맘에 쏙 드는 장갑이다. 많이 속상했다.

교회 관리인에게 전화하여 내가 있던 장소를 자세히 말하고 부탁해 보았으나 허사였다. 이튿날 새벽예배 마치고 다시 가서 재확인했다. 그래도 보이지 않는다.

하는 수 없이 서운한 맘을 접었다. 귀가하는 길에 어제 주차해 놓았던 그 차 있던 자리를 살펴보았다. 하얀 눈으로 덮여 보이지 않는다. 매우 서운하였지만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남편도 서운했는지 나보다 더 속상해한다.

오후에 산책 가는 길에 어제 우리 차 있던 자리로 눈길을 돌린다. 먼 발치에서 눈 녹은 자리를 바라본다. 약간 검붉은 색이 보인다. 궁금해서 얼른 가서 보았다.

그렇게 간절히 찾던 내 장갑 두 짝이 바퀴에 납작하게 갈린 채 흙투성이가 되어 주인인 나를 기다리고 있다. 눈을 비비고 다시 본다. 역시 내 장갑이다. 마음에 가득했던 서운함이 봄눈 녹듯 사라진다. 그동안 노심초사했던 마음이 개운했다.

난 눈이 녹아 흙이 많이 묻고 더러워진 젖은 장갑을 들어 우리 집 대문 안에 밀어 넣고 산책길에 들었다.

훨씬 발걸음이 가벼웠다. 상쾌한 마음으로 산책을 했다. 그동안도 온통 마음속엔 다시 찾은 빨간 장갑 영상뿐이다. 산책길의 발걸음은 나도 모르게 가벼웠다. 콧노래도 나왔다. 얼른 몇 바퀴를 돌고 집으로 부지런히 걸었다. 빨리 때묻은 그 빨간 장갑을 빨아 널기 위해서였다.

빨간 장갑은 큰 아들이 ROTC로 군에 입대하던 해 어버이날 등산복과 모자, 장갑을 빨간색으로 통일하여 내게 선물로 준 것이다. 사회 나가 처음 돈을 벌어 엄마에게 준 의미 있는 선물이다. 그 장갑을 낄 때, 등산복과 모자를 사용할 때마다 그 아이를 생각했고 그렇게 15년째 나와 함께 살며 정을 가득 붙인 나의 분신과도 같다.

장갑이야 돈을 주고 사면 그만이지만 살면서 애정을 가지고 붙인 정은 돈으로 살 수 없지 않은가. 때문에 밤새도록 하찮은 것에 마음을 썼다.

지인들이 보면 어찌 생각할까. 그 장갑하나 가지고 그렇게 골똘히 마음 쓴 것을 유별하게 생각할 수 있겠지. 장갑 주인이 아니니까.

우리 주변에는 생활하면서 돈으로 살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이 많이 있다.

아들도 그 장갑을 내게 사준 것을 잊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빨간 장갑이 낡아지며 세월 따라 묻고 자란 애틋한 정은 추운 날 장갑을 낄 때마다 가끔 비치는 겨울 햇살처럼 따뜻하다. 아들의 정과 내 마음이 함께 묻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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