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생 유린하는 쪽지예산
민생 유린하는 쪽지예산
  • 권혁두 기자
  • 승인 2015.12.06 16:3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충청논단
▲ 권혁두 국장

우리나라 소방관들의 1만명당 순직률은 2.12명이다.

최근 5년간 34명이 사고현장에서 진화·구조작업을 펼치다 순직했다. 순직률은 미국(1.03명)의 2배가 넘고 일본(0.42명)의 5배가 넘는다.

이 부끄러운 통계의 원인은 다른 수치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사정이 가장 좋다는 서울에 근무하는 소방관들의 지난해 장비 보유율은 80%에도 미달했다.

방화두건은 52.2%, 방화복은 86.8%, 장갑은 77.9%, 안전화는 83.3%에 불과했다. 100% 지급된 장비는 없고 지급된 장비의 노후도도 심각해 29%나 교체가 필요했다. 사용연한을 넘긴 소방차량이 21%에 달했다.

이런 환경에서 소방관들의 안전이 보장될리 없다. 서울의 사정이 이러니 예산이 훨씬 열악한 지방 소방서는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내년 예산에 반영됐던 특수 소방장비 보강예산 33억원과 소방헬기 보강 예산 72억원이 국회 예결위에서 삭감됐다.

소방관들의 정신건강 관리예산 12억원과 119 특수구조장비 확충예산 55억원 증액 요구도 거부됐다. 이 예산들은 여야 실세 의원들의 지역구 예산을 늘리는 데 들어갔다. 이런저런 감투를 쓴 증견 의원들이 수십억에서 수백억원대 지역구 예산을 증액했다.

최경환·이정현·원유철·박지원·이종걸·안민석 등등 여야가 다르지 않았다. 국회 예결위원장은 모교의 국제문화회관 건립사업 예산을 50억원이나 늘렸다.

의원들의 몰염치한 행태에 밀려 100억원 남짓의 소방장비 보강 예산은 퇴출됐다. 청년 일자리 창출과 저소득층 주거 지원 등 서민 예산도 다수 희생됐다.

상습 침수지역 등 재해 위험 지역 정비비 200억원도 깎였다. 군부대 난방 연료비 170억원도 깎이고 훈련에 참가하는 예비군의 점심값과 교통비를 1인당 3000원씩 올려달라는 요구도 일축됐다.

의원들이 예산을 심의하는 동료 예결위원들에게 자신의 지역구와 관련된 예산을 올려달라며 내용을 적어 전달하는 쪽지 예산의 폐단이 지적된 것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러나 개선은커녕 갈수록 노골적이고 뻔뻔해지고 있다. 수범이 돼야 할 다선과 리더급 의원들이 앞장을 서고 후배 의원들이 답습하는 모양새다.

쪽지 예산이 넘나드는 증액심사는 비공개로 진행된다. 회의록도 없다.

이유는 뻔하다. 정작 민생에 필요한 다른 예산을 깎아야 하기 때문이다. 여야는 매일 참여위원 1명씩을 교체하는 변칙적 방식으로 예결특위 예산안조정소위를 운영한다. 의원들은 교체 멤버로 들어가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교체돼 들어간 의원이 하루동안 무슨 일을 할 지는 안봐도 비디오다. 국회법 84조는 쪽지 예산을 막기 위해 ‘예결위가 소관 상임위를 통과한 예산을 손댈 경우 상임위의 동의를 얻으라’고 규정하고 있지만 휴지쪽에 불과하다. 이번에 삭감된 소방장비 예산도 예산을 증액한 해당 상임위원이 본회의에 들어가서야 알았을 정도다.

혁신을 화두로 노선경쟁이 치열하게 전개되는 야당의 의원들이 여당 의원들과 보조를 맞추며 지역구 예산 챙기기에 몰두하는 모습에선 분노와 낙담을 넘어 동정심이 들 정도다. 아예 예산 편성 과정에서 예산을 잔뜩 부풀린 후 심의에서 이를 감액하며 의원들의 쪽지 민원에 대처하고 있다는 웃지못할 얘기도 들려온다. 예결위를 연중 상설 운영하고 예산심의 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는 개선책이 수년째 제기되고 있지만 의원들에겐 소귀에 경 읽기다.

남은 해법은 유권자들의 인식 전환이다. 지방의원 역할에 머무는 국회의원의 행태에 현혹되지 말자는 얘기다. 지역예산을 얼마나 따왔느냐는 평가와 추궁은 전 국회의원을 ‘쪽지의원’으로 만들고 국가예산 운영의 비합리와 불균형으로 이어져 유권자와 2세들의 미래에 그림자를 드리울 뿐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