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책임의 막장
무책임의 막장
  • 권혁두 기자
  • 승인 2015.10.25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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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 권혁두 국장

지난 9월 서울에서 글로벌보건안보구상(GHSA) 포럼이 열렸다.

GHSA는 지난해 전염병 확산과 생화학적 테러를 막기 위해 출범한 국제기구이다. 세계 46개국 고위급 관계자와 세계보건기구(WHO) 등 국제기구 전문가, 국·내외 언론인 등 200여 명이 참가했다. 지난 5월부터 메르스 대응 실무를 책임졌던 보건복지부 담당 국장도 연사로 나섰다.

그는 “단기간에 많은 메르스 환자가 발생했지만 정부가 민간 부문과 신속하게 협력하며 총력 대응에 나선 결과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는 요지로 발언했다. 장황한 자화자찬이 이어지자 국내는 물론 외신 기자들도 기가막히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우리 정부의 시행착오에서 메르스에 대한 교훈을 얻을까 기대했던 해외 전문가들도 생각은 같았을 것이다. 초기 대응이 부실했고 이후 과정도 우왕좌왕으로 일관하며 곳곳에서 구멍을 드러냈던 것이 메르스에 대처했던 우리 정부의 수준이었다. 오죽하면 보수 언론조차 대통령에게 대국민 사과를 촉구했겠는가. 그런데도 이날 주무부처의 자체 평가는 ‘퍼펙트’ 였다.

실책과 과오에 대해 당사자가 스스로 책임을 인정하고 대가를 감수하는 사회는 발전을 기대할만한 사회다. 그 다음은 책임을 지우는 사회다. 책임을 져야할 사단을 만든 사람이 회피할 경우 물리적으로 책임을 강제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춘 사회가 그렇다. 그나마 희망이 있는 사회다. 그 다음부터는 후진적 사회다. 문제의 당사자도, 그에게 책임을 물어야 할 시스템도 작동하지 않는 무책임의 사회다. 퇴보 내지는 답보가 강요되는 사회다. 보건복지부의 ‘정부의 기민한 대응으로 유례없이 급증한 메르스를 성공적으로 제압했다 ’는 강변은 바로 책임을 지지도 않고 책임을 지우지도 못하는 시스템 부재의 우리 사회에서나 나올 수있는 우울한 코미디다.

국민들은 근자에 스스로 책임지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청문회들을 보자. 아무리 추잡한 흠결이 드러나도 그저 인사권자에 머리를 조이리며 버틸 뿐, ‘나는 그릇이 되지 않는다’며 가당찮은 욕망을 스스로 접은 인사를 만난 기억은 가물가물하다. 수 십조원의 혈세를 날려버린 4대강과 자원외교에 대해서도 정권 내에서는 누구하나 책임을 지지도 책임을 묻지도 않는다.

무려 18조원이 투입된다는 한국형 전투기(KF-X) 사업의 표류에서도 무책임의 극치가 드러난다. 이 사업은 프로젝트의 명칭에서 드러나듯 한국(형) 전투기 개발이 목적이다. 국산 전투기에 접목할 첨단 기술의 확보가 관건인 사업이다. 국방부는 지난해 돌연 기술이전을 보장한 전투기들을 외면하고 가격이 가장 비싸고 아직 개발단계인 미국 F-35A로 선회했다. 당시 방사청장은 국회에서 “F-35A 제작사인 록히드사로부터 4대 핵심기술 이전을 약속받았다”고 장담했고 국방장관도 “책임지겠다”고 했다. 이 호언들은 거짓으로 드러났다. 지금까지 록히드사나 미 정부는 단 한 번도 핵심기술 이전을 언급한 적 없고 일관되게 이전 불가 원칙을 고수했다. 사업은 목적을 상실했고 국민은 관료들의 세치 혀에 농락당했지만 정부는 매우 기형적인 방식으로 책임을 희석하고 피하려 했다.

국방장관이 대통령 방미에 동행해 미 국방장관을 만나 읍소했다. 대답은 ‘노’였다. 미 정부는 박 대통령 방미에 앞서 수 차례나 기술이전 문제는 테이블에 올리지 말 것을 요청했다. 자신들의 입장이 확고부동한 만큼 피차 난처한 대화는 빼자는 얘기였다. 뻔한 대답을 듣기 위해 펜타곤을 찾아 뻔한 대답을 듣고만 국방장관은 굴욕외교 비난까지 뒤집어썼다.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듯한 장면을 연출해 의혹과 무능을 덮으려던 처절한 노력은 국민의 복장만 뒤집었다. 그리고 나온 것이 “우리도 기술을 개발할 수 있다”는, 따라서 지금까지 ‘쌩쇼’를 했다는 고백이었다.

책임지는 풍토를 만들자는 말을 새삼 공허하게 만든 분들께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다. 무책임의 방식에 좀 더 예의를 얹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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