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탁
부탁
  • 정명숙 <수필가>
  • 승인 2015.09.29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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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짧다. 가을이 들이닥치니 여름을 잃은 느낌이다.

어제 아침의 바람보다 오늘의 바람이 더 차서 옷깃을 여미게 한다.

마음마저 서늘해지는데 일찍 일어난 작은딸이 함께 걷자고 따라나선다.

운동이라야 이른 아침에 동네를 벗어나 근동을 한 바퀴 돌아오는 일이다.

빨간 사과가 탐스럽게 달려 있는 과수원, 그 끝에 기대어 있는 논에는 벼가 누렇게 익어 땅을 향해 깊은 인사를 하고 있다.

새들 때문에 수수머리에 양파 자루를 씌워놓은 밭은 생소하고 감시카메라를 달아놓은 인삼밭을 지날 때는 눈길 둘 데가 마땅찮아 발걸음이 나도 모르게 빨라진다.

들길을 지나 산모롱이 돌아 집으로 오자면 한 시간이 넘게 걸리는데 딸이 말동무가 되어 준단다.

사과밭을 지날 즈음 작은 도랑에서 물안개가 피어올랐다. 무리지어 피어 있는 물봉선화와 고마리꽃은 안갯속에서 몽환적이다. 아침에 마주한 아름다운 풍경과 다르게 나는 지극히 현실적인 일로 딸에게 속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며칠 전 글쓰기 교실의 환갑 지난 수강생이 써온 글이 내 삶을 잠시 정지시켰기 때문이다.

주변을 돌아볼 사이 없이 바쁘게 앞만 보고 갈 일이 아니었다. 글쓴이의 70대 누님이 완치된 줄 알았던 신장암이 다른 장기로 전이되었다고 했다. 진료실에서 의사의 말을 들으며 복잡했던 심경과 누나에 대한 애처로움이 담겨 있었다.

작품합평이 끝나고 우리는 어느 순간 예상치 못했던 상황이 닥쳤을 때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하는지에 대해 진지한 토론이 벌어졌었다. 그날 내 결심은 더욱 굳어졌다.

딸에게 하는 엄마의 부탁은 무거운 짐이다. 그래도 묵묵하게 받아들이는 아이가 고맙다.

나는 진지하게 말했다. 만약 엄마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다면 결코 생명을 연장하려 인공호흡기도 달지 말고 영양제도 놓지 말라고. 외할아버지처럼 깔끔한 모습으로 떠나고 싶다 했다.

혹시 치매라도 생기면 서슴없이 요양원으로 보내 달라는 부탁도 했다.

딸은 어떻게 그리하느냐 한다. 저보다는 언니가 반대할 거란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을 절실히 깨닫는 요즘이라 간곡하게 말했다. 너희 생각보다는 부모의 의사를 존중해줘야 한다고 당부를 했다.

이젠 사는 날보다 세상을 떠나야 할 시간이 가까워진 나이다. 의미 있는 삶도 중요하지만, 삶의 마무리도 중요하다.

나는 요양원에 계신 시부모님과 돌아가신 친정아버지의 삶을 보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노화는 운명이고 언젠가 죽음은 찾아온다. 그 과정은 가파르게 곤두박질 치는 길이 될 수도 있고 완만한 경사길이 될 수도 있다. 내게 남아 있는 삶의 여정에 마음 다해 사랑하며 곤두선 가시도 눕히고 꽉 진 주먹도 펴고 살면 좀 더 편해질까.

바람이 맑다.

습도가 없는 가을바람은 사람의 마음속으로 먼저 불어오나 보다.

나뭇잎을 스치며 물기를 걷어가고 지칠 줄 모르고 영역을 넓혀가던 들풀들은 서걱거리게 한다. 풍화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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