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을 오르며
산을 오르며
  • 이창옥 <수필가>
  • 승인 2015.07.28 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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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 이창옥 <수필가>

산 초입에 섰다. 몇 년 만에 산행을 다시 시작한 동티를 내는지 몇 걸음 옮겼을 뿐인데도 숨이 턱 밑까지 차오른다. 숨을 고르며 한 계단 한 계단 발을 디디며 산을 오르고 능선을 따라 걷다 보니 어느새 정상이다. 

백화산은 어른 보폭으로 기껏해야 왕복 한 시간 정도 소요되는 운동하기 좋은 곳이다.

내가 백화산을 다니기 시작한 지는 이십여 년이 넘었다. 산 아래 넓은 도로가 뚫리기 이전부터 때로는 아이들 손을 잡고 가끔은 이웃친구들과 오르내리며 운동을 하던 곳이다.

산 아래 풍경은 하루가 다르게 변해 과수원자리에는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 논밭이었던 곳에는 호텔이 들어서고 대형 상가건물들이 줄줄이 들어서 옛 모습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산 아래 세상은 멈춤 없이 변해 가는데 산은 그 자리 그곳에서 침묵으로 변해가는 산 아래 세상을 지켜볼 뿐이다. 

산골 태생이라 그런지 어려서부터 산이 마냥 좋았다. 그렇다고 전문 산악인이 되는 꿈을 가져 본 적은 없었다. 산에 오르는 것이 좋고 나이 들어 마지막 마무리 삶도 산골이기를 소망하며 살아왔다.

산을 오르다 보면 수많은 생각이 교차하며 떠오른다. 그러다 어느 사이 모든 상념들은 눈 녹듯 사라지고 산속의 풍경이 마음속에 가득 들어와 차지하고 있다. 나뭇가지들이 바람결에 제 몸을 내어주고 이리저리 흔들리며 내는 소리는 내 안에 들어와 음악이 된다. 바람에 눕는 풀들은 숨이 차올라 헉헉거리는 나에게 힘이 들면 잠시 쉬어가도 괜찮다고 눈짓한다. 그러면 못이기는 척 근처 바위나 나무 그루터기에 걸터앉아 잠시 호흡을 고른다. 

유년시절 나에게 동네 뒷산은 올라가야 할 곳이 아닌 신나는 놀이터였다. 계절마다 다른 모습으로 반겨주는 놀이동산 같은 곳이었다.

돌이켜보면 혈기 왕성한 이십 대 때는 산을 치기로 마주했었다. 어느 곳 어느 산을 가더라도 정상에 발자국도장을 찍지 않으면 그날은 산을 오른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삼사십 대는 위선과 오만으로 산을 마주했지 싶다. 부끄럽지만, 산에 관해서는 이미 뭔가 터득한 양 떠들고 다녔었던 같았다. 

인생의 내리막길로 들어선 지금도 나는 여전히 이기적인 마음을 가슴 가득 품은 채 내 건강과 가족의 안위를 위해 산을 찾았다. 그래도 산은 묵묵히 품어줄 뿐 내게 어떠한 비난의 소리도 원망의 눈총도 보내지 않는다. 

이제 나도 산을 향해 고개를 숙인다. 예전에는 오만 방자해서 미안했다고, 내려와서는 오늘도 욕심 많은 나를 품어주느라 고생했다고 정말 고맙다고 고개를 숙인다. 

지자요수(知者樂水) 인자요산(仁者樂山).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라는 뜻의 공자 말씀 중 한 구절이다.

산을 무던히도 좋아하지만, 나에게는 별로 어진 구석이 없는듯하다. 글귀대로라면 분명 어진 구석이 조금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어진 구석은 고사하고 까다롭고 교만하게 살아온 듯하다. 이제는 유년시절처럼 순수한 마음으로 산을 오르기는 어렵겠지만, 산을 오르며 때가 낀 마음과 몸을 다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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