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서 네게로 가는 길
내게서 네게로 가는 길
  • 전영순 <문학평론가·수필가>
  • 승인 2015.07.12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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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스크래치
▲ 전영순 <문학평론가·수필가>

뚝뚝 수고의 흔적이 떨어진다. 메마른 내 우주에 생명의 물이 흐르고 있다. 송골송골 맺히는 것은 몸의 움직임에 따라 양을 조절한다. 이마에서 콧등에서 가슴에서 등줄기에서 고개를 숙이면 떨어지고 서면 흐른다. 가뭄의 단비처럼 봉사 없이 살아온 메마른 내 정서의 인정어린 열매다. 내게서 네게로 가는 길이다.

어릴 적 엄마가 일하며 자주 하시던 말, 콩죽 같은 땀을 흘리고 있다. 땀방울이 진주처럼 귀하게 느껴지는 시간이다. 요즘은 적당히 땀 흘리는 일을 즐긴다. 땀은 권태로운 삶의 희망, 아니 나태한 내 삶에 생명력을 불어넣어주고 있다. 잠념이 많아지고 삶의 의욕이 떨어지는 것 같아 나를 세워야겠다는 생각에 찾아 나선 것이 봉사활동이다. 베짱이처럼 그늘에 앉아 수박이나 먹으며 귀하게 굴리던 몸을 쓰려니 영 시원찮다. 

가뭄으로 대지가 헐떡이는 땡볕을 생각해 아침 일찍 서둘러 봉사활동에 동참했다. 오늘은 등산로에 웃자란 풀을 베기로 한 날이다. 산으로 올라가는 길은 아주 가파르다. 중앙에는 시멘트 포장이 되어 있고 길옆에는 흙과 나무토막으로 만들어 놓은 계단이 있다. 그 계단에 풀이 웃자라 사람들은 경사진 시멘트 길을 이용한다. 시멘트 길은 모래가 있어 미끄러지기 쉬워 조심스럽다. 이 길을 걷다가 넘어져 골절사고로 수술을 한 사람이 많단다.

일도 해본 사람이 한다고 호미를 들고 풀을 뽑으려니 누가 이기나 한 번 해보자고 버티는 바람에 달려든 나를 난처하게 만든다. 참 생명이란 모진 것이다. 그늘이나 부드러운 흙에서 자란 풀들은 쉽게 뽑히나 시멘트 사이를 뚫고 올라온 풀은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요지부동이다. 함께 한 우리는 자식에 비유하며 이구동성으로 생존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식을 강하게 키워야 한다는 쪽으로 자연스레 흘러갔다. 어느 집인들 귀하지 않은 자식이 어디 있으리오만 다들 자기 자식한테만은 유난히 인정이 후하다. 옛말에 귀한 자식일수록 천하게 키우란 말이 오늘 풀과 같은 이치겠지만 유독 한국 부모들은 자기 자식을 온실의 화초처럼 키우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한 엄마가 조심스레 입을 연다. 속칭 상위층에 속한다는 엄마가 자식문제로 학교에 찾아가 소동을 피우고 간 모양이다. 이유인즉 방과후 컴퓨터교실에서 어떤 사이트를 보고 있던 아이에게 한 아이가 변태라 한 것이 화근이었다. 변태 소리를 들은 아이의 엄마가 학교에 찾아가 소동을 부리고 갔단다. 풍문에 들은 얘기라 자세한 사항은 모르지만 변태라고 한 학생뿐만 아니라 선생님에게도 주의를 단단히 주고 갔다고 한다. 물론 귀한 자기 자식이 변태 소리를 들었으니 화가 났을 것이다. 그러나 주위 사람들이 학교에 찾아간 엄마의 행동에 대해 정도가 심하다고 입을 모으니 자식 키우는 부모 입장에서 한 번 생각해 볼 문제다. 새우 싸움에 고래등 터진다는 속담처럼 아이들 일로 어른들이 살인까지 저지르는 세상이니 어른 된 도리로서 좀 자제해야 할 부분이 아닌가 싶다. 험한 세상에 자식을 잘 키우려는 기우는 우리들 자신에게 달려있다. 아이들은 아이들 세상에서 서로 부딪기며 잘 살아가니 부모들은 밖으로 나와 땀을 흘려볼 일이다. 

흔히 우리는 잡초 같은 인생이라고 말을 한다. 하지만 잡초가 우리에게 얼마나 교훈을 주는지 우리는 잘 모른다. 호미로 나섰던 우리는 낫으로 하다가도 안 돼 예취기로 풀을 제거했다. 아무것도 모르고 덥석 달려들었던 나의 경솔함이 녹록지 않은 세상을 읽게 한다. 봉사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닌 것 같다. 봉사하는 사람들 따라다니다가 며칠 끙끙 앓고 있으면서도 기분은 나쁘지 않다. 삐거덕거리는 몸이라도 더 나이 들기 전에 부지런히 써 볼 작정이다. 내게서 네게로 가는 길 참 가깝고도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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