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도 없고 위징도 없는
태종도 없고 위징도 없는
  • 권혁두 기자
  • 승인 2015.07.05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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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권혁두 국장 <보은·옥천·영동>

당나라 태종은 형제를 죽이고 찬탈하다시피 황위에 올랐지만 문무에 걸쳐 발군의 업적을 일군 명군으로 평가받는다.

후세는 그가 제위에 올랐던 시기를 정관의 치(貞觀之治)라 부르며 칭송했다.

그가 가장 신임했던 참모가 위징(魏徵)이었다. 위징은 태종의 가신이 아니라 세자인 형의 측근이었다. 황위를 놓고 싸운 최대 정적의 참모를 응징하는 대신 자신의 사람으로 삼은 것이다.

태종이 주변의 반발과 간언을 물리치고 위징을 중용한 것은 현안을 꿰뚫는 혜안과 강한 소신을 높이 샀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징은 자신에게 기회를 베푼 태종에게 맹종하지는 않았다. 황제와 마찰을 빚은 일화가 적지않게 전해진다.

자신이 추천한 인물이 배제된 인사안이 올라오자 태종은 퇴짜를 놨다. 위징은 내려온 인사안에 손도 대지않고 다시 올렸다. 황제의 안목을 노골적으로 면박한 행위였다. 격노한 황제는 인사안을 갈갈이 찢어 위징에게 내던졌다. 그러나 위징은 조금도 주눅들지않고 종이 조각을 주섬주섬 꿰맞춘 다음 풀로 붙여 다시 품신했다.

태종은 부글부글 끓는 속을 누르고는, “어쩔수 없는 늙은이”라고 푸념하며 인사를 승인했다고 한다.

징집연령을 놓고 두 사람은 충돌했다. 황제는 징집연령에 미달하더라도 건장한 소년은 군대로 보내라는 조서를 내렸으나 위징은 안정적 국방력 유지에 독이 된다며 반대했다. 태종은 거듭 조서를 시행하라고 재촉했으나 위징은 요지부동이었다.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됐지만 태종은 결국 위징의 미래지향적 논리에 설복돼 뜻을 굽혔다. 지방 순시 길에 음식을 타박했다가 관리들이 보는 앞에서 위징에게 훈계를 듣기도 했다.

위징이 죽자 태종은 “나를 비춰줄 거울이 없어졌다”며 눈물을 흘렸다.

위징은 당나라가 개국 초기의 혼란을 단기간에 수습하고 태종이 권력을 확립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로 꼽힌다. 그러나 그가 소신껏 일할 수 있도록 판을 깔아준 태종을 만나지않았다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거나 초야에 묻혀 필부로 여생을 마쳤을 가능성이 높다.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박근혜 대통령이 2005년 한나라당 대표를 지낼 때 비서실장을 맡아 보좌했다.

박 대통령이 2007년 대선후보 경선에 나섰을 때는 선대위에서 정책메시지총괄단장을 맡았다. 원조 친박으로 불리는 이유다.

그런 그가 지금 대통령으로부터 배신자로 낙인찍혀 원내대표 사퇴를 강요받고 있다.

그가 배신의 굴레를 쓴 것은 대통령의 소신 대신 제 소신을 지켰기 때문이다. 그는 증세 확대와 복지 확대를 주장하며 대통령이 주창한 ‘증세없는 복지’는 허구라고 반박했다. 가진 자들이 더 양보해야 한다며 대통령이 반대하는 법인세 인상을 주장하기도 했다. 결정적으로 국회법 개정안 처리 과정에서 청와대와 방향을 달리하다 치명타를 맞았다.

그가 소신을 밀고나간 대가는 현재 잔혹한 방식으로 진행 중이다. 그렇다고 유승민이 이 전투의 패자가 될 것 같지는 않다.

우선 여론이 그에게 우호적이다. 쫓겨난다해도 훗날 정치판에서 유효하게 써먹을 ‘대통령과 당당하게 맞섰던 진정한 소신파’라는 이력을 달게 될 참이다. 내홍이 길어지면 결국 대통령과 당만 상처를 입을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그런데도 여권에서는 유승민에 대한 공격과 압박, 침묵과 방관만 있을 뿐 위를 향한 직언과 간언은 들리지 않는다. 대통령의 소신을 사수하는 소신들만 보일 뿐이다.

당원들에게 “청와대를 여당의 출장소로 만들겠다”고 외치며 최고위원에 당선된 인물이 지금 ‘출장소’의 심부름꾼으로 돌변해 좌충우돌 하는 풍경은 여권 내 참모십의 실상을 고스란히 압축한다.

정관시대를 함께 열어간 태종의 도량과 위징의 강직함이 새삼 떠오르는 시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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